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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p 18 2016

일기장-2장

한국의 캔디캔디 팬분들을 위해 귀한 시간과 노력을 아낌없이 투자해주신 chosen615 님께 깊은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 Ms Puddle

일기장

2장

역에서 동업자 여럿을 만난 다음부터 우리에게 휴식 시간이란 없었다. 뉴욕에서 배를 타고 떠난 지 며칠 만에 상파울루에 도착하자, 현지 동업자들과의 끝도 없는 미팅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조르쥬는 언제나 그랬듯이 믿음직스럽고 넓은 식견을 가진 비서 역할을 잘 수행해주었으며, 나는 그 옆에서 많은 걸 배웠다. 그밖에 하나 놀라운 점이 있었다면, 내가 점점 일에 재미를 붙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늦은 저녁까지 이어졌던 마지막 미팅을 마친 후, 나는 미팅 장소에서 한 블록 떨어진 호텔까지 걸어서 가자고 제안했다. 그런데 밖은 예상 밖으로 꽤나 쌀쌀했다.

“돌아가면 훨씬 따뜻하겠지. 여기는 이제 막 겨울이 시작된 모양이야.” 차가운 밤공기를 막고자 겉옷을 더 껴입으며 내가 말했다.

어렴풋한 미소를 지으며 조르쥬가 대답했다. “네… 내일부터는 더 추워질 거라더군요.”

길을 따라 걷던 중, 나는 한 옷가게 창가에 진열된 밝은 녹색 겨울 코트를 발견했다.

“조르쥬, 잠깐만.”

테리와의 재회를 성사시켜주기 위해 록스타운에서 캔디에게 봄 코트를 선물했던 때를 기억하면서 나는 진열대로 가까이 다가갔다. 다시금 떠오른 생각이 내 마음을 어지럽혔다. 그때처럼 그녀를 위해 내가 무언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왜 나는 지금 용기를 내지 못하고 있는 걸까? 가장 중요한 건 그녀의 행복이 아닌가.

이미 상점은 문을 닫은 뒤였다.

“잊지 않고 다시 올 수 있도록 내일 꼭 얘기해줘.”

조르쥬는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캔디스 님께 잘 어울릴 겁니다. 멋진 선물을 고르셨군요.”

지난 며칠 간 줄곧 그랬던 것처럼, 호텔 방에서 나만의 시간을 갖게 될 즈음 시각은 이미 자정을 훌쩍 넘어선 상태였다. 그래도 오늘은 꼭 캔디에게 편지를 쓰고 싶었다. 저번에 보낸 짧은 편지를 그녀가 받았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사실 난 출장 중 잠깐씩 시간이 날 때마다 그녀의 질문에 대해 어떻게 답을 해야 할지 생각하고 있었다. 이제 그 모든 걸 글로 옮겨 볼 참이었으니, 이번에는 쓸 내용을 심각하게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친애하는 아름다운(아마도?) 캔디,
지금 상파울루의 호텔에 있어. 드디어 혼자 있게 됐는데, 벌써 새벽 2시가 넘었네.
걱정 마. 건강하게 잘 있으니까.
요즘은 정말로 일하는 걸 즐기게 된 것 같아.
역시 우리 아버지의 피가 내게도 그대로 흐르고 있나 봐.
생일 날 즐거웠다니 다행이야. 파티도 마음에 들었으리라고 믿는다.
중간에 갑자기 떠나게 돼서 다시 한 번 정말 미안하고.

그리고 내가 정확히 언제 기억을 회복했는지, 전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설명했다. 어차피 한 번쯤은 얘기해야 할 테니까.

바로 얘기했어야 했는데,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어.
그래서 지금까지도 정말로 미안하게 생각하지만, 캔디 너와 함께 하는 포근하고 가슴 따뜻한 삶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았으니까.

헤어지지 않으려고 회복된 사실을 감추었던 내 마음을 캔디가 이해할까? 가문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그녀와의 생활을 지속했던 게 아니다. 매일 긴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돌아와 내가 떠올렸던 건 그녀의 미소 짓는 얼굴이었다.

널 만나지 못했더라면-.
캔디,
사고를 당한 직후의 난 기억도 없고 신원도 불분명한 의심스러운 사람일 뿐이었지.
하지만 넌 내 곁에서 떠나지 않았어. 병원에서 해고당하면서까지 절대 나를 버리지 않았어.
“반드시 기억이 돌아올 거예요”라는 네 말이 나를 일으켜 준 거야.
너를 구해주었을 뿐인데, 너는-.
고마움을 어떻게 다 표현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
너의 행복이 어디로 향해 있는지 지켜보고 싶다.
돌아가면 반드시 휴가 내서 만나러 갈게.
버트

그때 그녀가 없었더라면 난 과연 어떻게 되었을지 차마 상상도 할 수 없다. 그녀는 주위의 조롱거리가 되는 것도 무릅쓰고 항상 친절하고 애정 어린 손길로 나를 보살펴 주었고, 내 곁을 지켜주었다. 그런 그녀를 떠난 것은 오히려 내 쪽이었다.

답장을 쓰고 난 뒤 나는 앞으로 어떤 일이 닥치든 맞설 준비가 되어있다는 느낌이었다. 내가 계속 그녀를 향한 나의 감정을 확실히 하지 못한다면 그녀를 대하는 데에 있어서도 공평하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그녀에게 고백하기 전에, 먼저 무엇이 그녀를 행복하게 만들 수 있는지를 확실하게 알아야 한다. 그게 테리와의 재결합이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나는 스스로에게 그녀가 행복할 수만 있다면 나도 기쁘게 그녀의 행복을 빌어주어야 한다고 이야기하며 몇 번이고 다짐했다. 물론 그녀의 감정에 대해 지금껏 내가 오해했었다면 조금은 힘든 시간을 겪게 될 지도 모르지만, 다시 일어나 앞으로도 그녀의 행복을 지켜보아줄 수 있을 것이다.

다음 날, 나는 조르쥬에게 출장이 끝나고 돌아가면 포니의 집을 방문할 계획이라고 이야기했다. 그는 내가 충분히 휴식을 취할 필요가 있다며 일정 조정을 해보도록 노력하겠다고 대답했다.

7월이 되어 시카고에 돌아갔을 때, 우편함에 내가 기다리던 답장이 들어있는 것을 보자 나는 뛸 듯이 기뻤다. 그녀가 내 긴 편지를 읽었다는 뜻이었다.

친애하는 알버트 씨,
상파울루에서 언제 돌아오시나요?
포니의 집에는 언제 오실 건데요?
저한테 고마우시다면, 고마움에 보답하는 방법을 알려드릴게요. 얼른 오세요.
그런데, “버트”라구요? 사람들이 그렇게 부르나요?
귀여운 이름이에요!
오늘은 이만큼만 쓸게요. 편지 말고, 꼭 직접 만나서 이야기를 하고 싶으니까요.
제가 너무 인색했나요?
캔디

인색했냐고? 당연히 아니다. 그녀의 답장은 그리움이 더더욱 커지게 만들었고, 하루 빨리 그녀를 만나러 가고 싶다는 마음만을 불어넣어 주었다. 편지는 매우 짧았지만, 그녀 역시 나를 무척이나 만나길 원한다는 것을 뚜렷이 보여주었다. 그녀도 나를 그리워하고 있는 걸까?

조르쥬 덕분에 이번 주말에는 드디어 시간을 낼 수 있게 되었다. 캔디도 해피 진료소에서 일을 해야 하기 때문에, 아무래도 우리 둘 다 일요일에 만나는 것이 가장 편할 듯했다. 더불어 그녀는 아직 내가 돌아온 것을 모르고 있으니, 나는 깜짝 방문으로 그녀를 놀라게 해 줄 예정이었다.

이번에는 캔디의 일기장을 가지고 레이크우드로 갔다. 그리고 그것을 오래 전 그녀와 윌리엄 알버트 아드레이로서 처음 대면한 일광욕실 내 책상 위에 두었다. 내 정체를 알게 된 이상 내가 그녀의 개인적인 일기장을 가지고 있다는 걸 그녀도 알고 있을 테지만, 아직은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침내 일기장을 돌려주려고 마음을 먹으니, 왠지 더욱 차분하고 안정되어 있는 느낌이었다. 나는 가장 최악의 경우까지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이 일기장이 그녀가 여전히 테리를 사랑하고 있다는 걸 증명하게 된다면, 그렇게 되는 것이다. 어찌 됐건 이것은 그녀의 보물이고, 평생 가지고 있을 권리가 내겐 없지 않은가.

마음 편히 한 숨 자고난 후에 나는 아침이 되자마자 포니의 집으로 떠날 채비를 했다. 보통 입는 평상복보다는 조금 말쑥하게 차려입기로 했다. 내가 사랑하는 여인을 만나는 오늘만큼은 가장 멋진 나의 모습을 보이고 싶었다.

그래서 난 로즈마리 누님의 남편이었던 빈센트 씨가 2년 전 프랑스에서 사온 검은 수트를 골랐다. 결과가 어떻게 나오던 간에 오늘은 중대한 날이고, 또 기억에 남을만한 날일 것이다. 그저 오늘은 캔디가 나무에 오르자고 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목적지에 다다를수록 나는 긴장하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호흡이 점점 더 가빠졌고, 가슴이 두근거렸다. 5월 이후로 캔디를 다시 보는 것은 처음인 만큼, 그녀를 어서 빨리 만나고 싶은 마음에 운전이 평소보다 더 오래 걸리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녀는 내 갑작스런 방문에 어떤 반응을 보일까? 오늘은 할 일이 많다며 달갑지 않은 표정을 짓거나 무관심해하지는 않을까? 나와 함께하기 위해 오늘 하루의 시간을 기꺼이 내어줄까? 나는 두 손을 모으고 아직 그녀가 아이들과 밖으로 나가지 않았기를 간절히 기도하면서 서둘러 도착하기 위해 페달을 더 세게 밟았다.

아무도 나를 알아보지 못하기를 바랐기 때문에, 나는 일부러 포니의 집에서 꽤 떨어진 곳에 주차를 했다. 하지만 엔진을 끄고 있던 중에 한 소년이 내 차를 향해 다가왔다. 엄격한 예의범절을 지키며 그는 내게 허리를 굽히고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아드레이 씨.”

이 잘생긴 친구를 전에 만난 적이 있었던가? 어떻게 내 이름을 아는 걸까?

그가 물었다. “대장을 만나러 오신 건가요? 지금은 포니의 집에 있지 않은데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지만, 나는 이내 소년을 알아보고는 외쳤다. “지미? 지미 맞니? 많이 컸구나, 목소리도 훨씬 남자다워졌는걸!”

“저도 이제 어른이에요, 아드레이 씨.” 내가 차에서 내리는 동안 그가 얼굴을 붉히며 웅얼거렸다.

캔디가 어디에 있는지를 물어보려는데, 그는 나와 나란히 키를 재보더니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도 아드레이 씨보다 훨씬 작네요. 이미 제가 키를 뛰어넘은 지 오래인데도, 대장이 아직까지도 저를 어린애로 취급하는 이유를 알만해요.”

나는 방금 그가 한 말을 곱씹어보았다. 왜 나와 비교를 하려는 걸까?

그가 덧붙였다. “대장은 호숫가로 아이들과 낚시를 하러 나갔어요. 저는 카트라이트 씨를 도와드리는 일이 다 끝나서 대장을 도우러 그쪽으로 가고 있던 참이었고요. 여기 와 계시다고 가서 얘기할까요?”

“아니.” 그녀가 다행히도 이 주변에 있다는 것에 안심하며 내가 대답했다. “그리로 날 데려가줄 수 있니?”

그는 약간 놀란 듯했지만, 곧바로 표정을 바꾸며 킬킬거렸다.

“죄송해요, 아드레이 씨. 지금 당장 대장을 만나게 해드릴 수는 없을 것 같아요. 차림새가 엉망이 되어있을 게 뻔하거든요.”

우리 둘은 동시에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이렇게 기분 좋은 웃음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그래도 모셔다 드릴게요. 오셨는데 얘기 안 하고 있었다는 걸 알면 나중에 대장한테 혼날 거예요.”

“그럼 부탁할게.” 인내심이고 뭐고 포기한 채 내가 얼른 대답했다.

“이쪽으로 오세요, 아드레이 씨. 지름길로 안내해드리죠.”

그는 나를 포니의 언덕 쪽으로 이끌었고, 언덕을 오르는 동안 나는 그에게 캔디가 하는 대로 나를 편하게 알버트라고 부르라고 얘기했다. 하지만 즉시 단호한 대답이 돌아왔다.

“포니 선생님께서 저희는 반드시 정중한 호칭을 써야 한다고 하셨어요. 아무리 대장이 모두가 아는 대로 아드레이 씨를 첫째 이름으로 부른다고 해도 말이죠. 저도 몇 번이고 항의했지만, 레인 선생님이 대장은 특별한 경우라고 해서요.”

그가 캔디를 따라해 보였다. “알버트 씨가 어쩌구, 알버트 씨가 저쩌구…” 나 웃었다.

그가 말했다. “대장이 얼마나 자주 우편함을 확인하는지 모르실 거예요. 아드레이 씨의 편지만을 기다리면서요.”

그 말을 듣고 나는 기쁜 감정을 주체할 수가 없었지만 이렇게 말했다. “캔디를 항상 지켜보고 있구나, 지미.”

화끈하게 달아오른 그의 얼굴을 보고 나는 덧붙였다. “그런데 알버트는 내 첫째 이름이 아니야. 뭐, 신경 쓰진 않아도 돼.”

“정말이요?” 그가 당황해서 물었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멀리서부터 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알버트 씨? 알버트 씨 맞죠?”

심장이 쿵쾅거렸다. 캔디!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금빛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언덕 위를 달려오는 그녀가 보였다.

나도 그녀에게 달려갔고, 그녀는 뛰어올라 내 목에 팔을 두르며 외쳤다. “왕자님, 정말로… 드디어 오셨네요! 이게 꿈이 아니라고 말해주세요…”

캔디가 나를 여전히 ‘왕자님’이라고 부르고 있다!

“아니야, 캔디. 꿈이 아니야.” 그녀를 꼭 끌어안으면서 내가 부드럽게 대답했다.

그녀가 전혀 괴리감을 느끼지 않아 하는 것을 알게 되자 감정이 북받쳐 오르는 듯했다. 너무 감동을 받은 나머지, 순간 그 자리에서 그녀에게 사랑을 고백해버릴 뻔했다. 나는 계속 그녀가 테리와 지금 어떤 사이인지를 알아볼 때까지 기다리라고 자신에게 타일렀다. 이따가 돌려줄 그녀의 일기장이 중요한 첫 발걸음이 될 터였다.

우리가 포옹을 나누는 동안 지미가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대장, 내가 대신 호숫가 가서 애들 놀아줄게.”

그러자 그녀는 쑥스러운 듯 얼굴을 붉히며 포옹을 풀었다. “고마워, 지미. 부탁해.” 내 옆에 서 있던 지미의 존재는 미처 눈치 채지 못했던 모양이었다.

“천만에. 난 지금 할 일이 없거든.” 그가 씩 웃으며 대답했다.

그녀는 멋쩍어하며 설명했다. “낚싯대를 더 가지러 가던 중이었거든요… 그런데 제 눈을 믿을 수가 없어서…”

목소리가 어색하게 떨리자 지미가 그녀를 놀렸다. “됐어, 대장. 좋은 하루 보내세요, 아드레이 씨!” 나를 향해 돌아서며 정중하게 인사를 한 그는 손을 흔들고 휘파람을 불며 언덕을 걸어 내려갔다.

그런데 그 다음 캔디가 보인 행동이 나를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그녀는 이쪽저쪽으로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무얼 찾는 거니, 캔디?”

“알버트 씨, 조르쥬가 와서 모시고 갈 예정인가요?” 약간 눈살을 찌푸리며 그녀가 물었다.

“아니, 이번엔 안 와도 된다고 확실히 얘기해두었어.” 항상 중간에 떠났던 것에 대해 미안함을 느끼며 내가 대답했다.

나는 침착해지려고 애썼다. “오늘 시간 되니?”

그녀는 장난스럽게 눈썹을 들어올렸다. “글쎄요. 왜요?”

가슴이 뛰었지만, 평소와 달리 너무나도 편안한 느낌이었다. 기억하건대 내가 이렇게 그녀에게 데이트를 신청한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을 것이다.

나는 힘을 내어 말했다. “캔디, 오늘 하루는 완전히 시간을 낼 수 있어.”

그녀의 눈썹이 더 높이 올라갔고, 얼굴엔 미소가 떠올랐다. “그래서요?”

생각했던 것보다 더 어려웠지만, 할 말을 미리 생각해둔 것이 참 다행이었다.

“그래서 말인데, 오늘 내 휴식 시간에 함께해줬으면 좋겠어. 늦었지만 네가 원했던 생일 선물을 주려고 하는데, 받아주겠니?”

그녀가 기분 좋게 외쳤다. “그럼 같이 제가 좋아하는 나무에 오를 정도로 시간이 많이 있는 거예요?”

나는 웃음을 지었지만, 그 질문이 승낙의 의미인지 아닌지 감을 잡기 어려웠다.

하지만 그녀가 바로 덧붙였다. “농담이에요, 알버트 씨. 오늘은 정장을 입으셨으니 멋진 옷을 더럽히고 싶지는 않아요. 마음에 둔 계획이 있으신 건가요?”

그제야 나는 그녀를 똑바로 응시할 수 있었고, 지미의 말이 틀렸다는 생각을 했다. 그녀는 엉망이라는 단어와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아이들과 놀아주느라 올려 묶은 머리는 약간 헝클어져 있었지만, 장밋빛 뺨과 빛나는 눈은 평범한 옷을 입고 있어도 그녀를 매력적인 여인으로 만들어주었다. 주체할 수 없는 충동이 그녀를 다시 끌어안고 싶게 했지만, 다행히 이성이 이를 억제했다.

나는 신사답게 허리를 굽히며 말했다. “물론입니다. 오늘 하루 그대와 함께 레이크우드에 갈 수 있는 영광을 제게 주지 않으시렵니까?”

내 초청에 그녀는 짧게 숨을 들이마시고 다시 질문을 던졌다. “혹시 무슨 일 있으신 건가요? 또 다른 동행자도 있나요?”

나는 긴장감을 감추기 위해 큰 소리로 목을 가다듬었다. “우리 둘뿐입니다, 캔디스 양. 그리고 정말 아무 일도 없어요. 다시 원래 질문으로 돌아가서… 오늘 시간 되니?”

그녀는 두 눈을 반짝였지만, 잠시 후에 미소를 감추고 의심하는 듯한 표정을 짓더니 천천히 내 말을 다시 따라했다. “언덕 위의 왕자님이 저와 단 둘이서 시간을 보내기 위해 저를 레이크우드에 데리고 가신다고요?”

내가 입술을 꾹 다물고 고개를 끄덕이자, 손뼉을 치며 그녀가 기쁘게 답했다. “선생님들께 우선 말씀드린 후에 옷을 갈아입고 와야겠네요!”

“좋았어! 그럼 가는 거다!” 나는 입이 귀에 걸릴 정도로 웃으며 한편으로는 안심했다. 그녀가 너무나 흔쾌히 나와 함께 레이크우드로 가는 것에 동의했으니, 내가 헛된 걱정을 한 셈이었다.

포니의 집 건물로 가는 길에 내가 그녀에게 말했다. “캔디, 아직도 나를 언덕 위의 왕자라고 부르-”

“앗! 깜빡했어요.” 그녀가 혀를 내밀며 대답했다. “그럼 아버지 아니면 윌리엄 큰할아버지라고 부를까요?”

“뭐?” 나는 놀라서 소리치며 그녀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하지만 곧 그녀가 명랑하게 웃으며 앞으로 걸어나가고 있음을 발견했다.

재미있게도 그녀는 빠르지도 않게 뛰다가 나를 향해 돌아보며 마치 나 잡아봐라 하는 것 같은 움직임을 보였다. 내가 눈치 채고 그녀를 잡아채자, 그녀는 작게 비명을 질렀다. 그 순간 나는 그녀를 꼭 끌어안고 싶은 마음과 열심히 싸워야 했다. 대신 나는 다정한 손길로 그녀의 오른손목을 잡고 다가가 뺨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그러자 마치 첫 키스를 받은 것처럼 그녀의 뺨이 붉게 물들었다.

“알버트 씨, 왜 그러세요?” 그녀의 목소리가 나를 현실로 돌아오게 했다.

그녀가 약간 부자연스러운 웃음을 짓고 있었고, 난 내가 계속 그녀의 손목을 잡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행히도 입을 맞추지는 않았다. 잠깐의 환상이었지만, 너무 생생했다.

“미안해, 캔디. 아팠니?” 나는 재빨리 그녀를 놓아주었다.

그녀는 내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고개를 저어 보였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부끄러워했다.

나는 힘겹게 침을 삼키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생각하면서 반 장난으로 말했다. “다시는 아버지라고 부르지 마. 아니면 내가 너를 할머니라고 부를 거야. 알겠습니까, 캔디스 마님?”

내가 화가 난 듯이 표정을 지어보이자 그녀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바로 그때 나는 우리가 큰 나무 그늘 아래에 서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가장 튼튼한 가지에 사다리가 매달려 있었다.

“네가 이걸 맨 거니, 캔디?”

“아뇨. 지미가 했어요. 모든 아이들이 저희만큼 용감하고 날렵할 수는 없을 테니, 나무에 쉽게 오르지 못할 아이들을 위해 말이에요.”

“그것 참 멋진 생각이네!” 나는 동의하는 뜻을 전했다. “네가 가장 좋아하는 나무 맞지?”

그녀의 미소는 나를 너무나 황홀하게 만들었다. 수년 전 우리의 첫 만남이 떠올랐다. 그 때에도 그녀는 이렇게 환한 미소를 지었었다.

잠시 멍했던 나머지 그녀의 말을 놓칠 뻔했다.

“어렸을 때 이 나무에 올라서 입양되어 가는 아이들을 향해 작별의 인사로 손을 흔들곤 했었죠.”

생각에 잠긴 목소리로 위쪽 가지를 올려다보는 그녀의 에메랄드 빛 눈과 긴 속눈썹이 햇빛 속에서 반짝였다. 나는 거의 넋을 잃고 말았다. 그녀는 지금 자신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전혀 모르는 것 같았다. 그때 그 꼬마 울보 소녀가 이렇게 매력적인 여인이 될 줄 누가 과연 알았겠는가?

내가 지금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전혀 눈치 채지 못한 채 그녀가 나를 향해 돌아섰다. 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이렇게 얘기했다. “지금은 노을이 지는 것을 보면서 알버트 씨의 편지를 읽는 장소가 되었죠.”

나는 그녀에게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갔다. “저번 답장에서 네가 ‘버트’가 뭐냐고 물어봤었지…”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도대체 왜 갑자기 입을 연 걸까. 적어도 오늘 저녁까지는 이 이야기를 꺼내지 않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기뻐하며 대답했다. “맞아요! 정말 귀여운 이름이에요! 대학 다니실 때 불리던 별명인가요?”

난 어쩌다보니 로즈마리 누님이 그 별명을 지어줬다는 것까지 말하게 됐다. “누님이 나를 ‘꼬마 버트’라고 불렀었지. 너 빼곤 아무도 모르는 얘기야. 조르쥬도 모르거든!”

“말도 안돼요! ‘꼬마 버트’라고요?” 그녀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감추기 위해 손으로 입가를 가렸다.

“진짜야, 물론 우리끼리 있었을 때에만 말이지. 누님이 세상을 떠났을 때 난 아마 지미보다도 어렸었을 거야.” 나는 옛 시절을 떠올리며 추억에 잠긴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 순간 그녀의 얼굴에서 쾌활함이 떠나갔다. “누님이 그리우시죠?” 그녀가 조용히 나를 바라보며 입을 뗐다.

나는 잠시나마 그녀의 두 눈을 똑바로 응시하고 주먹 이야기했다. “누님을 잃은 후 내 주변에는 나를 진심으로 사랑해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어. 가문에서 누님만이 유일하게 나보고 진정한 내 자신이 되라고 격려해주었었지. 캔디, 폭포에서 다시 만났을 때의 네 모습이 누님을 떠올리게 했다고 말해준 적이 있었나?”

그녀는 내 시선과 마주하며 천천히 고개를 저었고, 이내 쑥스러운 듯 눈길을 피했다.

“너와 대화할 때면 정말 무슨 비밀 얘기든 꺼내놓고 싶어져. 그래서 편지로 그 별명을 포함해서 내 자신에 대해 많은 얘기를 하게 된 것 같아.”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여전히 눈을 마주치기를 꺼려했다.

지금보다도 더 좋은 시점이 없을 것 같아서 나는 용기를 내어 최대한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녀에게 말했다. “네가 원한다면 ‘버트’라고 불러도 좋아.”

그 말에 놀랐는지, 사랑스러운 그녀의 얼굴이 새빨갛게 변했다.. 무언가 말을 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았지만, 결국 아무 말도 그녀의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내가 한 말을 다 하려던 순간 머지않은 곳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포니 선생님과 레인 선생님 두 분은 내가 갑자기 나타난 것에 대해 약간 놀란 듯한 얼굴로 우리 둘을 바라보고 있었다.

두 분은 우리를 포니의 집으로 데리고 가셨다. 캔디가 레인 선생님과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포니 선생님이 분주하게 나를 위해 먹을 것과 차를 준비해주셨다. 그리고 잠시 뒤 돌아온 레인 선생님은 나를 향해 친절하게 미소를 지으신 다음 캔디에게 말씀하셨다. “물론이지, 캔디. 아드레이 씨와 함께 다녀오렴.”

“알버트 씨, 잠깐만 기다리세요.”

그 말만 남기고 그녀는 복도 쪽으로 얼른 달려갔다.

레인 선생님은 캔디가 순식간에 사라진 것을 보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작게 한숨을 내쉬셨다.

포니 선생님이 먼저 대화를 시도하셨다. “아드레이 씨, 남미 출장은 어떠셨나요?”

“물어보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포니 선생님.” 나는 내 앞에 놓인 차를 홀짝이며 대답했다. “빡빡한 일정의 연속이었습니다만, 그래도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좋은 성과를 얻게 되어 다행일 따름입니다.”

그제야 포니의 집 아이들을 위해 사온 선물들을 깜빡하고 차에 두고 왔다는 사실이 기억났다. 하지만 오늘 저녁 돌아오는 길에 다시 가지고 오겠다는 말을 하기도 전에 레인 선생님이 내게 질문을 던지셨다. “레이크우드에서는 캔디와 함께 얼마나 머물러 계실 예정인가요?”

그 순간 캔디가 방에서 돌아왔고, 포니 선생님은 그녀에게 밝은 미소를 지어보이셨다. 오래 걸리지 않을 거라고 하긴 했지만, 마치 무엇을 입을지 미리 정해두었던 것처럼 그녀는 예상보다 훨씬 빨리 나왔다.

포니 선생님이 다가가 그녀와 다정한 포옹을 나누셨다.

“캔디, 이리 오렴. 어머나 세상에, 레인 선생님! 여기 캔디 좀 보세요!”

나는 뒤에서 어떤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지 궁금하여 고개를 돌려 보았다가 시야에 들어온 그녀의 모습을 보고는 그만 입을 다물지 못했다. 옷을 갈아입은 그녀는 더욱 생기발랄해보였고 아름다웠으며, 더군다나 내가 록스타운에서 보내준 봄 코트를 입고 있었다. 단정하게 빗어내려 어깨까지 내려오는 금빛 머리카락은 물결치듯 흘렀다.

나는 서둘러 정신을 차리려고 애쓰면서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그녀에게 눈을 맞추며 다가갔다. “오늘 정말 너무 아름답다, 캔디. 이제 갈까?”

그녀는 수줍게 고개를 끄덕이며 다녀오겠다는 인사로 두 선생님을 한 번씩 꼭 안았다.

나도 선생님들과 악수를 하며 말했다. “포니 선생님, 레인 선생님. 저도 내일 아침까지는 시카고로 돌아가야 하니, 오늘 저녁까지는 캔디를 다시 데리고 오겠습니다.”

그러자 포니 선생님이 따스한 미소를 얼굴에 한가득 담고 말씀하셨다. “서두를 필요 없으니 그저 안전 운전만 하세요, 아드레이 씨. 캔디, 제발 오늘만큼은 숙녀답게 행동해야 한다. 알겠니?”

캔디가 내게 짓궂게 윙크했다. 그녀는 공손히 선생님들께 인사를 했다. “그럴게요, 포니 선생님, 아무 걱정 마세요.”

머지않아 우리는 포니의 집을 나섰다.

캔디는 입고 있는 코트를 가리키며 말했다. “보내주신 선물에 대해 한 번도 감사 인사를 못했었던 것 같아요.” 그리고는 유감스럽다는 목소리로 덧붙였다. “코트가 너무 마음에 들어서 록스타운까지 입고 갔었어요. 그때 거기 안 계셔서 못 보셨죠?”

‘캔디는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걸까?’

“근데 지금은 벗어도 될까요, 알버트 씨? 조금 덥네요.”

“당연하지! 겉옷을 벗으라는 얘기를 하려고 했어. 어쨌든 선물이 마음에 들었다니 다행이다. 오늘밤 돌아오는 길에 아주 유용해질 거야.”

나는 그녀를 보며 웃었다. 그녀가 무슨 의도로 록스타운에서의 이야기를 꺼냈는지 파악하기 위해 머리를 굴리고 있던 참이었다. 나는 그녀가 코트를 벗는 것을 도와주고 왼팔로 받아들었다.

차 쪽으로 걸어가던 중에 나는 그녀가 그녀의 눈과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밝은 녹색 드레스를 입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녀가 가진 옷 중에서 가장 좋은 것들 중 하나라지만, 사실 상류층 여성이 입는 값비싼 옷과는 비교가 안됐다.

캔디도 아드레이 가의 일원으로서 원한다면 호화로운 삶을 살수야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오히려 소박하고 수수한 쪽을 더 선호했다. 그러고 보면 우리 둘은 그동안 다른 세계에서 살았지만 어릴 적부터 많은 공통점을 공유해온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그녀가 앞으로 지금의 나와 함께 살아가게 된다면 그것은 곧 현재의 생활방식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을 뜻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기꺼이 내 사랑을 받아들여줄까?

“어디에 주차하셨어요, 알버트 씨?” 그 목소리에 나는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조금 더 걸어야 해. 서두르자, 오후에 충분히 레이크우드를 돌아보려면 시간이 많지는 않을 것 같다.”

그녀가 환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레이크우드를 돌아볼 건가요? 둘이서요?”

“네, 캔디스 양.” 나도 그녀를 바라보았다. “원치 않으신다면 다른 계획을 세울까요?”

“아뇨, 너무 멋진 생각이에요!” 그녀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어보였다.

내가 오른팔을 살짝 굽히자, 그녀는 흔쾌히 팔짱을 꼈다. 우리는 그대로 아이들처럼 행복하게 웃으며 차를 향해 달려갔다. 그녀와 다시 시간을 보내게 될 것이라니 너무 기대가 되었다. 그저 포니 선생님과 레인 선생님이 우리의 이런 모습을 보지 못하기를 바랐다.

내가 운전대를 잡자마자 캔디는 느닷없이 질문을 던졌다. “알버트 씨, 정말로 제가 ‘꼬마 버트’라고 불러도 돼요?”

“아니. 난 ‘버트’라고 했지, ‘꼬마 버트’라고는 안 했어, 캔디. 내 나이대로 보아선 이제 ‘버트 아저씨’가 더 맞지 않나?”

그녀가 깔깔대며 웃었고, 이는 내게 꼭 음악 소리처럼 들렸다. 나는 스쳐가듯 제안을 했다. “스코틀랜드 민속 노래 부르는 법 알려줄까?”

그녀의 눈이 흥분과 기대로 빛났다. “네! 노래하시는 것 듣고 싶어요! 저번 편지에서 스스로를 멋진 목소리의 소유자라고 하셨던 것 같은데요?”

레이크우드로 가는 길은 즐거움의 연속이었다. 우리는 주변의 경치에 푹 빠져있으면서도 쉴 새 없이 수다 떠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캔디의 동행만으로도 너무나 행복해지는 것 같았다. 그녀는 내가 지금까지 만나본 사람 중 가장 사랑스러운 여인이었고, 그녀와 함께 있을 때면 언제나 편안했다. 잠시 침묵이 흐를 때면 그녀는 창문 밖 먼 곳을 조용히 응시했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그녀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지가 참 궁금했다.

전에, 캔디는 우리가 보이지 않는 실로 이어져 있는 것 같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그 실이 우리를 긴 세월 속에서 서로에게 이끌어 주었다고 말이다. 그녀의 말대로 우리가 운명인지 아닌지에 대한 답을 이제 확인해봐야겠다. 오늘 그녀에게 일기장을 돌려줌으로써 그녀의 행복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게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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