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s Puddle's Haven

일기장-1장

한국의 캔디캔디 팬분들을 위해 귀한 시간과 노력을 아낌없이 투자해주신 chosen615 님께 깊은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 Ms Puddle

일기장

1장

늦은 오후의 햇볕이 넓고 긴 창문들을 통해 들어와 서재를 아름다운 노을 빛으로 물들인다. 문을 몇 번 열고 나가면 바로 테라스로 이어지는 서재다. 이제 곧 여름이 오려나 보다. 푸른 하늘에 뭉게구름이 낀 멋진 일요일이지만, 나는 책상 위에 놓인 밑도 끝도 없는 서류를 마주하며 지루한 일상의 고단함을 느끼고 있다.

길게 기지개를 켜고 하품 의자에 기대어 앉아 창문 바깥을 응시했다. 잠시 하던 모든 일을 잊은 채 야외에서 한숨 좀 돌리고 싶은 마음이 너무나 강했지만, 내일 상파울루로 출장을 가기 전까지는 이번 시즌 보고서 검토를 모두 끝내야 하기 때문에 이대로 있을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또다시 하품을 하며 눈을 감고 관자놀이를 문질러보았다. 솔직히 지금껏 내가 마땅히 책임져야 하는 의무로부터 도망쳐왔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작년에 기억을 다시 회복하고 나서야 나는 이 가문에서의 내 사명을 받아들이고 제자리로 돌아올 마음의 준비를 할 수가 있었다. 이탈리아에서 일이 난 뒤 이어진 시간들은 내게 확실한 교훈을 주었다. 나는 무작정 아프리카로 떠나버린 이후의 내 이기적인 행동 때문에 여러 사람들이, 특히 고모님과 내 비서 조르쥬가 많이 고생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뿐만 아니라 나는 사고로 거의 목숨을 잃을 위험에 처하지 않았었던가. 다행히도 캔디가 근무하던 시카고의 병원으로 후송되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못했다면 난 아마 자신의 신원도 모른 채 그대로 죽음을 맞이했을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니, 캔디는 무얼 하며 오늘 같은 일요일을 보낼까? 햇살 아래에서 아이들을 재미있게 놀아주고 있을까? 포니의 집 아이들과 함께 시카고를 찾아왔던 것이 불과 얼마 전이기는 하지만, 나는 벌써부터 그녀를 무척이나 그리워하고 있다. 모두를 데리고 오라고 한 내 제안 때문에 고모님의 뒷골이 꽤나 쑤셨을 거라고 생각하니 웃음이 나왔다.

나는 그녀가 생일 전에 내게 쓴 편지에서 했던 말을 떠올리며 킬킬거렸다.

두구두구두구… 어떤 이의 생일이 다가오고 있어요!
그럼 어디 한 번 언덕 위의 왕자님께 주문을 걸어볼까요?
수리수리마수리, 짜잔!
그날, 왕자님이 “울든 웃든 언제나 예쁜 소녀”를 만나러 포니의 집에 올 지어다!
소녀를 위한 최고의 선물은 오랜 시간 함께 있어주고 대화하는 것이 될 지어니!
이제 마법에 걸리셨겠죠?

편지 속 재미있는 주문이 내게 어떤 의미로 다가왔는지 그녀는 전혀 예상하지 못할 것이다. 그녀는 또래의 여성들이 흔히 생일 선물로 바라는 보석이나 드레스가 아니라 단지 내가 곁에 있어주기를 원한 것이다. 그 솔직함이 말로는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감동을 안겨주었다.

사실 나 역시 편지를 받기 전부터 생일 선물을 준비하고 있기는 했었다. 당일 하루 함께 시간을 보내려고 휴가를 내기 위해 최대한으로 일정 조정 시도도 해보았다. 문제는 여러 상황이 이를 호락호락하게 내버려두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녀가 내 요청에 따라 시카고까지 왔음에도 불구하고 정신없는 일정 때문에 내가 그녀와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은 아주 잠깐에 불과했다. 그래도 잠 못 자고 땀 흘려가며 단장한 새 방과 목재 가구들을 보고 기뻐서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은 그동안의 노력을 보상하고도 남았다.

“이게 전부가 아니야, 캔디. 보여줄 게 더 있어.”

나는 캔디를 마구간 뒤쪽 뜰로 데려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녀는 오래 전 라건 가의 마구간지기로 일할 때 돌보았던 시저와 클레오파트라를 만나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하지만 곧이어 열린 생일 파티에서 나는 오래 자리를 지킬 수가 없었다. 긴급한 문제로 또 한 번의 회의가 예정되어 있었던 것이다.

“조르쥬가 본사에서 기다리고 있어. 지금 가야 할 것 같아, 캔디.” 나는 지켜보는 다른 눈이 없는 자리에서 안타까운 표정으로 말했다.

나를 말없이 바라보던 그녀는 굳이 실망감을 감추려고 하지 않았다. “지금이요? 이렇게 일찍?”

나는 슬프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생일 축하한다, 캔디. 친구들과 좋은 시간을 보내길 바라.”

“선물 고마워요, 알버트 씨.” 그녀는 애써 웃음을 지어보이며 속삭이듯이 말했다.

그녀가 원한 것은 나의 존재였지, 다른 어떤 선물이 아니었던 것이다. 나는 특별한 날에 그녀에게 슬픔을 안긴 장본인이 되고 말았다. 그래도 그러한 솔직담백함이 내가 사랑하는 그녀의 장점이지 않을까.

캔디는 내가 지금까지의 세월 동안 만난 이들과는 확실히 달랐다. 많은 사람들이 약해 보이지 않기 위해 가면을 쓰곤 하는 반면, 캔디는 자신의 감정을 애써 감추려고 하지 않았으며 항상 나를 신뢰해주었다. 그러나 오늘만큼은 한결같은 그 솔직함이 나로 하여금 죄책감을 느끼게 하였다. 문득 시카고로 오라는 초대에 그녀가 얼마나 기뻐했는지가 생각났다.

하지만 내게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고맙긴. 더 오래 있지 못해서 미안해…”

어렵게 등을 돌리자 뒤에서 외침 소리가 들렸다.

“잠깐만요, 왕자님!”

캔디가 달려와 나를 꼭 끌어안았다. 그러자 오래전, 특히 내가 기억을 잃었을 때에 우리가 수없이 나누었던 따뜻한 포옹들이 기억났다.

친숙하지만 언제나 달콤한 향기. 그녀의 향기 속에 숨쉬며 아담한 체형의 그녀를 내 팔로 감싸안고 있으니, 내가 이처럼 그녀를 안은 지가 꽤 오래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내가 그녀와 함께 할 때에야 진정 완전함을 느낀다는 것을 그제서야 알게 됐다. 그녀는 내 가슴에 머리를 기대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알버트 씨, 너무 무리하지 않겠다고 약속해주세요.”

그리고 그녀는 나에게서 천천히 떨어지며 나를 응시했다. 애원하는 듯 반짝이는 두 눈은 내게 많은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캔디와 더 오래 포옹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조금 있으면 곧바로 시카고를 떠날 그녀를 언제 또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를 상황이었다. 그녀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하지만 다른 모든 생각을 버리고 그저 아무렇지도 않은 척할 수밖에 없었다.

“약속할게.”

그러자 그녀는 눈부신 미소를 지어보였고, 나는 그녀를 다시 내 품 속으로 끌어당기고 싶은 충동과 맞서 싸워야만 했다.

그녀는 내 전용 기사가 기다리고 있는 입구까지 나를 바래다주었다. 다행히도 가는 길에 평정심을 되찾아 헤어지는 순간에는 쾌활하게 인사를 나눌 수가 있었다.

“다시 한 번 생일 축하해, 캔디. 오늘 하루를 마음껏 즐기렴!”

시선을 내리고 그녀가 웅얼거리며 대답했다. “알버트 씨가 없으면 그럴 수가 없는 걸요…”

나는 할 말을 잃어버렸다. “편지해, 캔디.” 그것이 내가 덧붙일 수 있는 말의 전부였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자 나는 말 그대로 자신을 차로 밀어 넣기 전에 잠깐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 차가 방향을 트는 동안 몸을 돌린 나는 그녀가 여전히 같은 자리에 서서 나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차를 멈춰 세우고 돌아가려고 하지 않기 위해서 애써 그 모습을 외면하고 자리에 꼿꼿이 앉아 있어야만 했다.

갑자기 들린 노크 소리가 회상에 잠겨있던 나를 현실로 불러왔다.

“들어와요!”

조르쥬가 양손 가득 무언가를 잔뜩 들고 서재로 들어왔다. 나는 이마에 손을 짚고 신음했다.

“조르쥬, 오늘은 이제 제발 그만!”

책상 위에 가져온 것들을 올려놓으면서 그는 눈치 채지 못할 정도로 재빠르게 입꼬리를 올렸다.

허리를 가볍게 굽히고 나서 그가 말했다. “윌리엄 님, 이전에 미처 전해드리지 못한 편지들입니다. 제 실수에 대해 사과드립니다. 틀림없이 이들 중 몇몇을 가려내어 읽어보시리라 생각되오니, 잠시 후 돌아와 내일부터의 일정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실례합니다.”

의미심장한 그 말에 내 앞에 잔뜩 쌓인 편지들에 대한 호기심이 솟아올랐지만, 전부 평소와 그다지 다를 것이 없어보였다. 맨 마지막 편지를 빼곤 말이다. 한 눈에 캔디의 필체를 알아본 나는, 곧바로 봉투를 뜯어 편지를 읽기 시작했다.

알버트 씨께.
알버트 씨! 알버트 씨!
오, 이렇게 큰 소리로 반복해서 부를 필요는 없는 걸까요? 제 목소리가 들리세요?
하지만 너무 행복해서 자꾸만 부르고 싶어져요…
알버트 씨, 정말 고마워요!

더없이 기분 좋은 웃음이 저절로 입가에 번졌다. 정말로 내 이름을 몇 번씩이고 부르는 캔디의 목소리가 곁에서 들리는 것만 같았다. 그녀 외에 이렇듯 내 마음을 편안하게 해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계속해서 편지를 읽어보니, 그녀가 시카고에서 열렸던 생일 파티에 대해 만족하는 것 같아 안심이 되었다. 다만, 예상대로 그녀는 내게 불평을 토로했다. 편지를 쓰는 동안 뾰로통한 표정을 지었을 그녀의 얼굴이 쉽게 상상이 되었다.


하지만 제 주문이 완전히 먹히지는 않았던 모양이에요. 알버트 씨와 이야기를 나누기엔 정말 짧은 시간이었어요.
많이 바빠 보이시던데… 건강이 염려돼요.
그거 아세요? 마틴 선생님도 너무 무리하면 안된다고 하셨어요.
혹시나 기억 상실증이 재발할 수도… 그건 생각만 해도 싫네요!

이어서 그녀는 우리가 작은 아파트에서 함께 살았던 때에 대해 이야기했다. 가난하고 과거에 대한 기억도 없었지만, 지금껏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절이었다는 것은 절대 부정할 수 없다. 그녀는 본인 스스로도 많은 고민과 어려움을 안고 있었지만 나를 돌보기를 마다하지 않았고, 내가 자신이 그녀에게 짐만 되는 존재라고 느끼지 못하도록 노력해주었다. 나는 그 친절을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전 알버트 씨의 그 말을 언제까지나 잊지 않을 거예요 – 함께 모든 것을 나누자고 하신 것 말이에요.

이 부분을 읽다가 나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가끔씩, 만약 사고가 나기 전에, 혹은 기억을 회복하자마자 그녀에게 내 정체를 알렸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궁금해지곤 한다.

나는 내가 아무것도 모르고 양녀와 사랑에 빠졌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자 그녀에게 바로 기억의 회복을 알릴 수가 없었다. 그것이 곧 처음 약속했던 대로 현재 생활의 종말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그때 그녀는 테리와의 이별 후 옛 사랑에 대한 많은 좋지 않은 소식들로 인해 힘들어하고 있었다. 그래서 새로운 사랑을 맞이할 상태도 아니었을 뿐더러, 후견인과 사랑에 빠지는 것은 더더욱 원치 않았을 것이다. 설령 내가 나의 감정을 고백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내 정체를 밝히는 것은 우리의 관계를 영원히 돌이킬 수 없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회복 사실을 숨기고 그녀 곁에 남아 앞으로도 계속 그녀를 지지하고 돕는 오빠처럼 지내기로 마음의 결정을 내렸다. 난 기쁜 일이건 슬픈 일이건 모두 둘이 함께 나누자고 제안하기도 했고, 그때 그것은 정말로 내 진심에서 우러나온 말이었다.

그러나 나날이 깊어져 가는 그녀를 향한 나의 사랑은 멈출 수가 없었고, 이에 따라 나는 스스로에 대한 질책과 질문을 계속해서 이어갈 수밖에 없었다. ‘내가 지금 그녀에게 바라는 것은 무엇일까?’ 대답은 매번 똑같았다. ‘조금만 더 기다려보자.’

몇 달이 지나고, 어느 날 밤 나는 우연히 이웃들이 내가 그녀의 진짜 오빠가 아니라는 것을 눈치챘음을 알게 되었고, 결국 그녀 앞에서 사라져버리는 길을 택하게 되었다. 진실을 밝히지도 않은 채, 모든 것을 함께 나누자고 했던 약속을 스스로 깨버린 채 말이다. 하지만 그때 이후로 그녀와 다시 재회하기까지 난 내가 그녀를 떠나버린 것에 대해 얼마나 또 후회하고 후회했는지 모른다.

나는 나의 빈자리가 그녀를 외롭고 슬프게 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었다. 그러나 운명은 닐의 계략을 계기로 우리가 재회하게끔 만들어주었다. 내 진짜 정체를 알게 되었을 때 그녀가 느낀 감정은 충격 그 이상이었을 것이고, 어떻게 보면 동시에 크게 화가 난 것 같기도 했다. 나는 그녀가 그러한 불만을 내비치는 것에 동의했고, 이해했다. 마지막으로 떠나기 전애 남겨둔 편지를 통해 내 기억이 이미 오래 전 회복되었고 이를 솔직하게 말하지 않은 것에 대해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나를 생각하고 걱정하느라 무수히 많은 밤, 잠들지 못했다고 했다.

내가 그녀의 정략 약혼을 취소시킨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어느 날 그녀는 나를 찾아와 포니의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이야기를 했다. 이는 내 정신이 번쩍 뜨이게 하는 신호와도 같았다. 그 때 내가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았더라면, 우리 둘 사이의 거리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점점 멀어졌을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나는 마침내 내 마지막 비밀을 그녀에게 밝히기로 마음먹게 되었다. 그리고 감사하게도 내가 포니의 언덕에서 언덕 위의 왕자로 다시 나타나자 그녀는 이를 받아들이며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이런저런 기억들을 떠올리는 동안, 바깥에서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들렸다. 나보고 밖으로 나오라고 이야기하는 건가? 나는 의자에서 일어나 캔디의 편지를 마저 읽기 위해 다른 편에 놓인 소파로 터벅터벅 걸어갔다. 그런데 그 다음 문장이 나로 하여금 당황하여 그 자리에 우뚝 서게 만들었다.

전 정말로 알버트 씨의 기억이 곧 돌아오기를 바라고 있었지만요, 사실 같이 남매처럼 살아가는 것도 나쁘지는 않았어요… 지금은 여동생이 아닌 양녀가 되었네요!

그럼 제가 알버트 씨를 “아버지”라고 불러야 하는 건가요?

그나저나, 도대체 언제쯤 기억을 회복하셨던 거에요?


알버트 씨의 아름다운 양녀 올림

“뭐?! 아버지?” 나는 경악해서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는 앞으로 달려나가 문을 열어 젖혔는데, 마침 그곳에 서있던 조르쥬와 마주치고 깜짝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손이 허공에 떠 있는 것으로 보아 그는 막 문을 두드리려는 참이었던 모양이다. 아까 얘기했던 대로 다시 돌아온 것이었지만, 나는 지금 전혀 출장에 대해 논할 기분이 아니었다.

“조르쥬, 잠깐 바람 좀 쐬고 올게. 조금만 기다려줘.”

그가 대답할 새도 주지 않은 채 나는 목적지도 없이 서두르는 발걸음으로 저택에서 나왔다. 알고 있는 것은, 그저 지금은 내가 일에 집중하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뿐이었다. 캔디의 질문이 계속 머릿속에서 울리고 있었다.

‘… “아버지”라고 불러야 하는 건가요?’

사실 그녀의 질문은 현실적으로 납득 가능한, 아니 오히려 마땅히 그래야 하는 말이었고 더이상 피하기만 하면 안 되는 말이었다. 애초에 입양으로 맺어진 우리의 관계는 애매모호하다 못해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었다.

나는 과연 그녀에게 어떤 존재인가? 이 질문조차도 대답하기가 쉽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전혀 서로를 아버지와 딸로 대하지 않았다. 캔디가 나의 마지막 비밀을 알게 된 이후부터 우리는 편지를 교환하기 시작했고, 그녀가 이미 내게 거의 모든 것을 털어놓은 이상 이제는 내가 그녀에 대한 강한 신뢰를 보여줄 차례였다. 그녀의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나는 내가 자라온 환경, 어릴 시절 내 곁을 지켜주었던 소중한 사람들과 과거에 겪은 일들, 그리고 현재 내 삶에 큰 영향을 미치는 요인들에 대해 자세하게 이야기해주었다. 나는 항상 솔직하고 진실한 마음으로 편지를 썼다. 내가 그녀에 대해 느끼는 감정을 밝히지 않은 것만 빼곤 말이다. 이렇게 주고받은 편지들은 우리 둘을 단순한 친구 사이 이상으로 가깝게 해주었음에 틀림없다.

나는 내가 정처 없이 마구간을 향해 걷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마구간에 들어서자마자 입고 있던 옷은 신경 쓰지도 않고 가장 아끼는 말에 올라탔다. 몇 분간 말을 타고 숲 속을 달리면서 나는 스치는 바람처럼 내 머릿속을 가득 채운 모든 고민과 문제들이 잠깐만이라도 날아가 버리기를 바랐다.

얼마 되지 않아 나는 아드레이 본가에서 조금 떨어진 호수 한 편에 도착했다. 꽤 오래 달려 지쳤을 말이 쉴 수 있도록 잠시 한숨 돌리기로 하고, 나는 말이 풀을 뜯어먹는 사이 호숫가에 앉아 호수를 조용히 바라보았다. 주변의 적막과 경관이 나를 위로해주었고, 혼란스러웠던 마음이 다시 잔잔한 물결처럼 편안해졌다.

편지 끝부분에 적힌 캔디의 질문에 어떻게 답하면 좋을지 생각하던 중 그녀가 저번에 보낸 답장에 쓰여 있던 말이 갑자기 떠올랐다. 그녀는 다시는 나를 “큰할아버지”라고 부르지 않겠다고 약속했었다. 또한 우리가 서로에게 더욱 더 가까워졌다고 느끼는 만큼 나 혼자 모든 문제를 짊어지도록 놔두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럼 왜 이번에는 “아버지”라고 불러야 하느냐고 물었을까?

나와 캔디의 관계를 알지 못하는 사람은 내가 이토록 쩔쩔매고 있는 것을 어이없게 여길지도 모른다. 난 엄연히 그녀의 양부다. 그런데도 내 입에서는 그것을 인정하는 긍정적인 답변이 차마 나오지 못하고 있으니, 곧 내가 우리의 법적인 관계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는 것 아닌가. 절대 그렇게 되기를 바라지 않는다는 것을 스스로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내가 부정한다면, 그 다음은 어떻게 되는 건가? 혹시 나는 내심 그녀로부터 어떤 반응을 기대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게다가 그녀는 내가 정확히 언제 기억을 되찾았는지를 물었다. 얼마나 오래 내가 진실을 숨겼는지, 그리고 회복 이후에도 어째서 그녀를 떠나지 않았는지를 추궁하는 것과 같은 의미일 테다.

문득 수영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매우 따뜻하다 못해 더운 날이었고, 호수는 하늘빛처럼 푸르렀다. 지금 내가 있는 곳은 숲 속에서도 특히 높은 나무와 덤불로 둘러싸인 외딴 곳으로, 로즈마리 누님이 세상을 떠난 이후로 가장 좋아했던 은신처였다. 힘든 일이나 고민이 있을 때 나는 곧잘 이곳 은신처를 찾아 호수에서 수영을 하곤 했고, 그럴 때마다 조금이나마 마음이 치유됨을 느꼈다.

그런데 오늘은 왠지 주변에 아무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선뜻 호수에 뛰어드는 것이 꺼려졌다. 그래서 간단하게 신발과 양말을 벗고 바지를 걷어올린 다음 오전의 뜨거운 햇볕으로 달구어진 물속에 발을 담그었다. 물살을 헤치며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자 산들바람이 내 머리카락을 스쳐 불어왔다.

나는 만족스러운 신음소리를 내며 이 평화로운 순간을 마음껏 즐기기 위해 두 눈을 감았다. 지난 몇 달 간의 수많은 업무로 누적된 긴장과 피로가 한껏 풀리는 듯했다. 바로 그 순간, 등 뒤에서 친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날씨가 참으로 훌륭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윌리엄 님?”

소리가 난 쪽으로 몸을 돌리자 조르쥬가 멀지 않은 곳에 서있는 것이 보였다. 나는 약간 놀랐지만, 당황하지는 않았다. 그는 내 속을 훤히 들여다 볼 정도로 나를 잘 아는, 개인 비서 그 이상의 존재였다. 기억하건대 그는 언제나 내게 있어 변함없이 가장 현명하고 사려 깊은, 그리고 믿음직스러운 친구였다.

아버지는 돌아가시기 전 조르쥬에게 나를 부탁한다는 마지막 유언을 남기셨다고 한다. 로즈마리 누님이 내게 꼭 어머니와도 같았던 것처럼,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거의 없는 나에게 조르쥬는 지금까지도 아버지의 상 그 자체였다.

“무얼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어… 조르쥬.” 나는 중얼거리며 호수 쪽으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는 계속 그 자리를 지키고 서 있었다. 지금은 누구와도 이야기하고 싶지 않은 기분이었지만, 그래도 조르쥬가 와주어서 기뻤다.

잠시 침묵이 흐른 후 그는 똑똑히 들리도록 목청을 가다듬는 소리를 냈다. 내가 바라보자 그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지금 윌리엄 님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고 있는 것은 캔디스 님의 편지인가 봅니다.”

정곡을 찌르는 그의 한 마디에 쓴 웃음이 나왔다. 조르쥬는 타인의 생각을 알아차리는 데에 뛰어났고, 나에게는 특히 더 그랬다. 어찌됐건 조르쥬야말로 내 인생 전체를 지켜보아온 사람이니, 내가 지금 어떤 문제로 고민하고 있는지 그라면 충분히 알만 했다.

두말할 것 없이 그는 작년에 내가 기억을 회복한 이후 처음으로 연락이 닿자마자 나를 꿰뚫어보았다. 비록 캔디와 함께 하는 생활을 계속하고 싶다는 나의 결정에 대해 다른 어떤 말도 하지 않았지만, 내가 내 양녀에게 어떤 감정을 갖고 있는지 그는 그때 눈치챘을 것이 분명하다.

캔디의 곁을 떠나 본가로 돌아온 후 나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내면의 괴로움을 숨기고 지냈다. 하지만 얼마 후 그녀가 닐과의 약혼을 강요당하자 조르쥬는 나의 지시를 거역한 채 레이크우드에 있는 윌리엄 큰할아버지를 찾아가라고 그녀에게 일러주었다.

결국 나와 캔디의 재회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그는, 그 다음 날엔 그녀의 엉터리 그림을 보게 되었다. 내가 사라진 후 나를 찾기 위해 그녀가 직접 그린 나의 초상화였다. 내가 그 그림을 무척이나 마음에 들어 하며 사무실에 걸어놓자, 과묵한 비서는 세상 진지한 표정으로 그림에 대해 이렇게 평했다. “돈으로 가치를 매길 수 없는 걸작이군요.”

그래서 나는 조르쥬가 어떤 문제들이 나를 줄곧 괴롭히고 있었는지 이해하고 있으리라고 확신하게 되었다. 그래도 몇몇 이유로 아직까지는 그에게 그 문제들에 대해 속 시원하게 털어놓은 적이 없었다. 그가 생각하는 바를 입 밖으로 꺼낸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그의 말에 무어라 대꾸해야 할지 몰라 하며 얼버무리고 있을 때 그는 조심스럽게 나에게 다시 물었다. “내일 상파울루로 떠나기 전에 캔디스 양께 답장을 보낼 계획이신가요?”

그 말을 들은 나는 긴 한숨을 내쉬었고,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으로 그에게 털어놓기로 결심했다.

“어떤 식으로 답장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 내 자신에게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해서는…”

내 솔직한 대답에 그는 눈썹을 추켜세웠다.

“캔디가, 자기가 나를 ‘아버지’라고 불러야 하는 거냐고 물어봤어. 그리고 자기가 내 양녀라고 말했는데, 그 순간 날카로운 칼날에 베인 듯이 가슴이 아파서… 그렇다고 일부러 나를 상처주려는 의도가 아니었다는 것쯤이야 나도 알고, 어쩌면 그냥 그저 그런 장난일 수도 있지만, 지금은 그 질문을 가볍게 받아들이기가 너무 힘들어.”

조르쥬가 순간 움찔했다. 평소엔 거의 없는 일이었다. 우리 둘 다 오래 전 내가 캔디를 입양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었다. 더군다나 그는 내 지시를 받들어 행한 장본인이 아닌가.

나는 수심에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출장을 연기하고 잠시나마 포니의 집에 가서 캔디를 만나 이야기할 수만 있다면… 하지만 직접 만난다고 해도 무슨 말을 해야 하는 거지?”

내가 사랑을 고백한다면, 그녀는 맨 먼저 어떤 반응을 보일까? 눈물을 흘리거나 웃음을 터뜨릴까? 그녀가 나를 더 이상 오빠처럼 여기지 않는다고 과연 확신할 수 있는가? 편지에서 그녀는 우리가 친남매처럼 함께 살았던 것이 나쁘지 않았다고 말했으니, 다시 그때처럼 지내자는 말을 하고 싶었던 걸까? 절대 그러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아니면 혹시 최악의 상황이 벌어져서, 그녀가 나를 후견인으로 여기기 시작한 것일 수도 있다.

잠시 생각을 정리한 조르쥬는 침착하게 다시 입을 열었다. “윌리엄 님, 이제 물 밖으로 나오시지요.”

나는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무슨 뜻이야, 조르쥬?”

“웬일로 주저하셨습니까? 언제나 수영하기를 좋아하지 않으셨나요?”

나는 킬킬거리며 변명했다. “난 이제 어린애가 아니야… 양 어깨에 많은 부담을 지고 살아가는 어른이 되었다고.”

물 밖으로 나와 그에게로 걸어가자 그가 나를 응시하며 말했다. “때로는 안전 지대를 벗어나 모험을 해야 할 때도 있는 법이지요.”

수수께끼 같은 말이었다.

“어쩌면 캔디스 님이 윌리엄 님의 마음을 알고 싶어 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내 마음을 알고 싶어 한다니?” 내가 급하게 물었다.

굉장히 신중하게 내뱉는 한 마디 한 마디였다. “캔디스 님과의 관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에 대해 말입니다.”

조르쥬의 일침은 내게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정말로 캔디가 오히려 나의 마음과 생각을 알기 위해서, 또는 그녀 스스로가 명확한 답을 찾지 못해서 그런 질문을 한 것일까?

내가 얼굴을 약간 찌푸리자 그가 덧붙였다. “윌리엄 님께서 레이크우드에서 정체를 밝히신 뒤 제가 갔을 때에 캔디스 님은 무척이나 행복해 보였습니다. 시카고까지 가는 도중에도 입가에 미소를 잃지 않으며 끊임없이 이야기를 하셨지요. 그토록 행복해 하는 캔디스 님은 처음 보았습니다.”

내 얼굴에 저절로 재미있는 미소가 떠올랐다. “생전 처음으로 정체불명의 후견인을 만났으니 들떴던 거겠지.”

전혀 동요하지 않고 그는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 “어느 누구보다도 윌리엄 님께서 그것이 진실의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계시리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그리고 그는 가볍게 허리를 굽히며 덧붙였다. “불필요한 참견에 대해 사과드립니다.”

“아냐, 아냐, 정말 괜찮아.” 나는 고개를 저었다. “오히려 많은 조언을 해줘서 고맙게 생각해. 기분도 훨씬 나아졌고.”

내 말에 그는 조용히 미소를 지어보였다. 지금 캔디와 나 사이의 관계가 어떤 상황에 놓인 것인지 정확히는 몰라도 우리의 인연의 끈이 더욱 단단해졌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강한 유대감 속에서, 그녀는 내가 인생을 함께하기를 원하는 유일한 여성이었다. 그러니 나도 남자라면 몸을 움직여 그녀도 나와 같은 감정을 가지고 있는지 알아볼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먼저 신중하게 생각해야 했다. 그녀가 혹시라도 마음의 상처를 입는 것은 절대로 원치 않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우리 사이에 금이 가게 할 치명적인 실수를 또다시 반복할 수는 없었다.

그런데 바로 내일 조르쥬와 중요한 출장을 떠나기 때문에 지금은 캔디와의 관계에 대해 고민할 시점이 아닌 듯했다. 생각해보면 일에 파묻혀 있는 것도 근심걱정을 잊는 데에는 나쁘지 않을 지도 모른다.

“지금 편지 속 캔디의 의도를 분석하려고 해봤자 별로 답도 안 나올 것 같아. 우선 돌아가자. 해야 할 일이 무지 많은 걸로 알고 있는데?”

조르쥬는 여러 가지 감정이 뒤섞인 얼굴이었지만, 더 이상 다른 말을 하지 않고 동의하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잠시 후에 서재에서 다시 뵙겠습니다, 윌리엄 님.”

그는 차를 타고 길을 따라 돌아갔다.

출장 준비는 순조롭게 진행되었지만, 하도 일의 양이 많고 시간도 부족한 탓에 저녁은 대충 서재에서 때워야 했다. 우리는 밤늦게까지 일을 계속했고, 드디어 내가 침실로 돌아갈 때가 되었을 즈음 조르쥬는 손님방에 가서 쉬었다.

하지만 침대에 눕고 나서도 나는 쉽사리 잠에 들 수가 없었다. 혼자만의 시간이 다시 찾아오자 마음은 자연스럽게 캔디의 편지에 향했고, 머릿속은 그녀의 진심이 무엇일지에 대한 궁금증으로 가득 찼다.

그녀는 내 선물에 대한 감사를 표현하고 그 외의 여러 가지 일들을 얘기하며 기분 좋게 편지를 시작했다. 그런데 무엇이 갑자기 그녀가 그런 질문을 하게 만든 걸까? 그냥 장난친 것이었을까? 아니면 조르쥬 말대로 정말 그녀는 나와 그녀의 관계에 대한 나의 의중을 묻고자 했던 걸까?

어느새 새벽녘이 되자, 나는 지금 잠에 들어봤자 소용이 없겠다는 생각에 침대를 빠져나와 방 한 켠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녀를 기다리게 해서 같았다. 몇 번씩 여러 장의 종이를 구겨버린 후에야 나는 그럭저럭 만족할 정도의 짧은 편지를 써낼 수 있었다. 문제의 첫 번째 질문에만 답을 하긴 했지만 말이다.

캔디,
차마 지금 내 기분이 좋다고 말하진 못하겠다. 다시는 그런 부담스러운 호칭을 쓰지 않겠다고 약속하지 않았었니?
“아버지”라니, 그리고 “아름다운 양녀”라니!
네가 아름답긴 해. 아마도…(지금쯤 뿌루퉁한 표정을 짓고 있겠지?) 그리고 나의 양녀인 것도 사실이지.
하지만 이 말을 하는 걸 깜빡한 것 같네. 나도 이 나이에 그리고 결혼도 안 한 상태에 양녀가 있다는 게 많이 당황스러워. “아버지”라는 호칭은 너무 과하다. 이래봬도, 난 굉장히 예민한 사람이야.(웃지 마, 캔디!)
이제 곧 상파울루로 떠날 거야. 도착하면 다시 편지할게.
포니의 집 아이들에게도 얘기해줘. 난 아버지의 역할을 다하고 있다고 말이야.
아버지라니-! 이런, 내 입으로 말해버렸잖아?
몸조심하렴. 모두에게 내 안부도 전해주고!
알버트

내가 그녀의 양부이자 후견인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렸냐고? 절대 아니다. 차라리 그랬으면 좋겠다. 이 말은 곧 다시는 그 끔찍한 사실이 떠오르지 않기를 바란다는 간접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어차피 또 골머리를 앓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나는 이제 아예 생각날 때마다 고개를 세차게 젓고 더는 떠올리지 않으려고 노력하곤 한다.

난 정말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그녀를 양녀로 대한 적이 없었고, 그건 사고가 나기 전에도 마찬가지였다. 내게 있어 캔디는, 그저 언제나 물심양면으로 도와주고 싶은 소녀였다. 그리고 지금 그녀는 완전한 숙녀가 되었고, 다행히도 나는 아직 독신이다. 그래도 부득이한 사정이 없는 한 입양을 취소하지는 않을 생각이다. 그 부득이한 사정은 그녀가 내 사랑을 받아들일 경우가 되지 않을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그녀가 신경 쓰지 않는 이상 끝까지 후견인, 혹은 양부로 남아 거리를 두고 그녀의 삶의 한 부분을 차지하며 살아가는 것이 나의 소망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다시는 그녀를 떠나는 실수를 저지르지 않겠다고 스스로 결심을 굳힌 셈이다.

편지를 봉투에 넣고 봉하면서 나는 캔디가 이 짧은 편지를 읽을 때 어떤 생각을 할지가 궁금해졌다. 혹시 실망하면서 “이게 다야?”라고 불평하진 않을까? 어찌됐건 나는 짧은 시간 동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고, 다시 편지를 쓰기 전에 좀 더 많은 고민을 해보려고 한다. 적어도 그녀는 법이 정해준 바에서는 조금 벗어날지언정 그녀가 나를 아버지로 여기지 않기를 바란다는 내 뜻을 알게 될 것이다.

해가 완전히 떠올랐다. 나는 바쁜 하루를 시작하기 앞서 얼른 간단하게 샤워를 했다. 조르쥬와 나는 이번 출장을 통해 최대한의 이득을 얻을 수 있도록 시간을 효율적으로 분배해두었기 때문에, 꽤나 빡빡한 일정이 될 터였다.

아침 식사를 하고 나서 서류 가방을 챙기기 위해 잠시 서재에 들렀는데, 갑자기 중요한 문서 하나를 깜빡하고 챙기지 않았다는 사실이 생각나 나는 여러 서랍을 하나하나 급하게 뒤져보았다. 찾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지는 않았으나, 나는 서랍 속에서 캔디의 가죽 일기장을 발견하게 되었다. 후견인에 대한 전교로 런던에서 쓰다가 성 바오로 학원을 갑자기 그만둔 후 그 연유를 이해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윌리엄 큰할아버지 앞으로 전달한 일기장이었다.

일기장을 보는 순간 수많은 기억과 영상들이 떠올랐다. 나는 잡생각을 뿌리치기 위해 서랍을 세차게 닫았다. 수납장 앞에 서있는 동안에도 빠르게 요동치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나는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후견인으로서 나는 그녀의 희망에 따라 아프리카에서 그 일기를 쭉 읽어보았다. 전체적으로 나에게 감사하는 마음이 뚜렷이 드러나 있었지만, 가장 마지막 페이지까지도 학원을 그만둔 이유는 정확히 나와 있지 않았다. 그로부터 몇 주 뒤, 나는 그녀가 간호 견습 학교에 들어갔음을 알리는 편지를 조르쥬를 통해 받을 수 있었다. 그래서 나 조르쥬를 통해 캔디에게 나의 의사를 전달했다. 내가 그녀의 결정을 존중하며, 언제 어디에서 어떤 방식으로 자신의 삶을 찾아가든 그녀가 아드레이 가의 일원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고 말이다.

그러고 보니 난 그동안 캔디의 편지에 적잖은 영향을 받아왔던 것 같다. 아프리카에 있었을 때에도 나는 안식처나 직업을 찾는 데에 어려움이 없도록 늘 아드레이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그들은 내가 도움을 필요로 할 것을 대비해 매순간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이 때문인지 내가 스스로 독립해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이 나를 항상 괴롭혔고, 결국 나는 그녀의 일기와 편지를 비롯한 모든 짐을 챙겨 아프리카에 와있던 아드레이 사람들에게 보낸 뒤 그들로부터 떨어질 용기를 내게 됐다.

난 일기장에 어떤 내용이 적혀 있는지 잘 알고 있다. 사실 미래의 길을 찾기보다도 캔디는 그녀에게 매우 특별한 한 사람을 찾기 위해 미국으로 왔다는 것도 알고 있다. 모든 글 자가 솔직함 그 자체였던 만큼, 나는 그녀의 테리에 대한 감정이 일기에 어떻게 표현되어 있었는지를 또렷이 기억한다.

내가 그걸 어떻게 잊을 수 있겠는가? 게다가 우리가 남매처럼 같이 살던 시절, 그녀는 나에게 그녀의 사랑에 대해 숨김없이 모든 것을 얘기했다. 단지 그때 난 내가 그녀를 사랑하게 될 줄 꿈에도 몰랐을 뿐이었다.

지금이 돼서야 비로소 내가 왜 캔디에게 진실을 말하기를 두려워하고 있는지를 깨달았다. 나는 그녀가 록스타운에서 테리와 의도적으로 만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지금껏 한 번도 현재 그와의 관계에 대해 직접적으로 물어본 일이 없었다. 깊은 내면에서는 그 예민한 주제를 꺼내는 순간 우리가 서로에게 심한 감정적인 상처를 준 채 회복하지 못할 정도로 멀어질 것을 두려워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때 부드럽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난 서랍 속 문서들을 잽싸게 정리하고는 고개를 돌려 조르쥬를 마주했다.

“가자, 조르쥬. 기차 시간이 다 됐겠다.”

2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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