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잠
낮잠
내가 왜 이러지? 자꾸 졸리움에 눈이 감긴다. 아마도 오후의 뜨거운 햇볕이 나를 이렇게 나른하게 만드는 것 같다. 아니면 아까 캔디와 함께 만들어 먹었던 맛있는 점심 때문일까?
믿음직스러운 내 비서 조르쥬가 곧 도착하여 캔디를 시카고로 데리고 갈 것이라는 걸 알고 있어서인지 우리는 하고 있던 모든 일들의 속도를 늦추기 시작했고, 그동안 나의 사랑스러운 천사는 내 곁에 앉아 화관을 만드는 데에 집중하고 있다. 하나는 내 것, 다른 하나는 내 애완용 스컹크 푸페 것일 테다. 산장과 가까운 들판에서 한창 거닐은 후 낚시와 나무 타기 등 야외 활동을 신나게 하다 보니 난 어느새 내 자신이 동행자의 법적 후견인이라는 사실을 까맣게 잊어버리게 된 것 같다. 몰래 그녀를 훔쳐보고 있자니,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띄운 채 작업에 열중하고 있는 그 모습이 너무나 사랑스럽지 않을 수가 없다. 이미 완성된 푸페의 것도 내게 충분히 길어 보이는데, 어쩌면 내 것으로는 훨씬 더 긴 화관이 만들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현재 만들어지는 속도와 아까 우리가 모아온 꽃의 양을 고려해볼 때, 꽃이 모두 엮어지는 데엔 얼마나 걸릴까?
그런데 어제 오늘 이틀간 계속 이어진 흥분 상태 때문인지, 그녀를 보고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몸이 피곤함을 견디지 못함을 느낀다. 눈꺼풀을 드는 것조차 자꾸만 힘겨워진다. 나만의 휴식이 조금 필요할 것 같다.
“캔디, 미안한데 잠깐동안만 눈 좀 붙여도 될까?”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녀는 즉각 내게로 시선을 돌렸고, 빛나는 그 눈을 크게 뜬 채 나를 바라보았다. “왜요, 지루하신가요?” 약간 서운한 듯한 목소리였다. 나는 그녀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호하게 고개를 젓고 살며시 그녀의 손을 토닥이며 나는 이렇게 말했다. “아냐. 다만 어제 잠을 제대로 못 자서 조금 피곤한 것뿐이야.”
“잠을 제대로 못 주무셨다니요? 무슨 문제라도 있었나요?” 그녀는 이제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는 나름대로의 변명거리를 찾아보았다. “문제는 무슨… 그냥 소파에서 자는 게 그다지 편하지 않았던 것 같아.” 목소리는 점차 잦아들었고, 멋쩍은 미소가 떠올랐다.
“맞아요,” 그녀는 내 눈길을 피하며 속삭이듯 말했다. 두 뺨이 홍조를 띄우고 있었다. “제가 알버트 씨 대신 침대를 쓰도록 해주셨으니까요.”
캔디는 아마도 그 잠깐의 홍조가 나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절대 모를 것이다. 어젯밤을 보내며 그녀는 나를 충실히 믿어주었고, 산장 내에 한 개뿐인 침대에서 잠이 들었다. 그녀를 응시하며 나는 순간 그녀를 끌어안고 싶은 강한 충동을 느꼈다. ‘네 손으로 입양한 양녀잖아.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자신에게 따끔한 충고를 하고는 주먹을 꼭 쥐었다. 그리고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목소리가 침착함을 되찾았을 거란 확신이 든 후에야 나는 다시 입을 열 수 있었다. “괜찮아. 그런 건 남자가 마땅히 양보해야지. 안 그래?”
내 말에 그녀는 살짝 웃고는 다시 명랑함을 되찾았다. 그리고 입꼬리를 들어올리는 쾌활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렇다면 얼른 쉬세요, 알버트 씨. 하던 것 끝내면 깨워드릴테니까요.”
좋았어. 다행히도 캔디는 원래 하던 대로 나를 ‘알버트 씨’라고 부르고 있다. 어제 ‘윌리엄 큰할아버지’라는 호칭으로 불리우면서 진심 어린 감사의 인사를 받을 때 얼마나 당황스럽고 쑥스럽던지. 난 그 인사를 도중에 그만두게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녀가 나를 양부로 여긴다니, 그건 절대로 원치 않는다.
나는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캔디를 입양했던 걸까? 물론 아무 이유 없이 무작정 저지른 일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내가 폭포 아래에서 사람을 구했을 때 난 정신을 잃은 그 소녀의 얼굴을 알아보았고, 목에 걸린 뱃지도 발견했다. 그녀는 나를 전혀 알아보지 못했지만 나 역시 내 모습이 예전과는 매우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게 오히려 당연하다고 여겼다. 오래 전 사춘기를 한창 겪는 십 대 소년이었던 나는 전후 사정이 어쨌던 간에 포니의 집이라고 불리우는 고아원 옆 동산에서 배회하고 있었고, 그곳에서 울고 있던 한 꼬마 고아 소녀를 만났다. 소녀는 내가 입고 있던 스코틀랜드 전통 의상에 호기심을 보였고, 내 백파이프 연주를 듣고 웃음을 되찾았다. 사실 그녀 역시 내가 몇 년 만에 처음으로 솔직하고 진실된 웃음을 짓게 만든 사람이었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난 실수로 가문의 뱃지를 떨어뜨렸던 모양이다. 나중에 듣자 하니 캔디는 뱃지를 소중히 간직하면서 ‘언덕 위의 왕자님’이라고 이름붙인 소년 시절의 나를 계속 추억해왔다고 한다.
첫 대면 이후로 꽤 긴 세월이 지났음에도 다시 만난 소녀는 키가 조금 큰 것 빼곤 전혀 외관상으로 변한 게 없어보였다. 그리고 그녀의 에메랄드 빛 눈과 매력적인 미소는 오래전 세상을 떠난 누님 로즈마리를 떠오르게 했다. 정신을 차리고 마음을 가라앉힌 후 뒤늦게 인사를 하며 그녀가 자신의 이름을 알려주자 나는 본명 대신 중간 이름(middle name)인 알버트를 내 이름으로 소개했다. 나는 이 나이 대의 어린 소녀가 가까운 친척인 라건 댁에서 마구간지기로 힘들게 일하고 있다는 사실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고, 진심으로 안타까움을 느꼈다. 그리고 며칠 후 그녀를 멕시코로 보내질지도 모르는 위기에 처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나는 지위를 이용하여 그녀를 돕기로 마음먹었다. 내 인생 가장 중대한 결정이었다.
지금이 되어서야 그 때를 돌아보자니, 입양 말고 다른 방법으로 그녀를 구출하는 것이 더 좋지 않았을까 싶다. 당시 난 캔디를 입양해달라고 부탁하는 세 조카들의 편지에 큰 영향을 받았던 것 같다. 거기다가 그때까지만 해도 가문의 이름을 주는 것쯤이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물론 그 때문에 고모님이 무척이나 노하셨지만 말이다. 하지만 내가 그녀를 입양한 것을 언젠가 후회할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나는 그 날들을 떠올리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다시 현실에 돌아와 베개로 쓸 적당한 크기의 통나무 조각을 찾기 시작했다. 캔디 바로 뒤에서 낮잠을 청해보고자 나는 일부러 베개를 그녀 가까이에 두었다.
팔베개를 하고 굽힌 무릎 위에 다른 다리를 꼰 상태로 잠에 들 준비를 했다. 캔디는 흘끗 내가 편안한 자세를 잡았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다시 화관 만드는 일로 돌아갔다. 그래서 그녀는 내가 지금 그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 내가 지금 그녀와 함께 있다는 것만으로도 너무 행복해서 웃음이 절로 나온다. 더군다나 몇 달 동안 그녀로부터 몸을 숨긴 후인지라 더 그렇다.
내가 어젯밤 쉽게 잠이 들수 없었던 진짜 이유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녀가 또다시 나와 같은 지붕 아래에 있었고, 내 소파 바로 옆에 있는 침대에서 천사와 같은 모습으로 곤히 잠들어 있었으니…
지난 번 조르쥬와 함께 정신없이 바쁜 출장 일정을 계속하고 있던 때에, 레이크우드의 별장에 돌아가 잠시 고독함에 빠져 휴식을 취하고 싶다는 계획에 대해 말한 적이 있었다. 부모님과 누님을 모두 잃고 고아가 된 이후로 나는 혼자 이른 아침을 레이크우드 별장 내의 일광욕실에서 보내곤 했다. 그곳에서 맞는 아침 햇살은 언제나 변함없이 내게 안정감을 주었다. 모든 하인들은 내가 일광욕실에서 조금이라도 시간을 보내지 않고는 하루를 시작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고,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방해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어제, 여느 때처럼 일광욕실에서 아침을 맞이하고 있던 내게 예기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오랫동안 그리워하고 또 그리워했던 그 목소리가 방 안의 정적을 깬 것이다. 바로 내 뒤에서, 그것도 자신을 정중히 소개하면서 말이다. 내 인생에서 가장 크게 놀란 순간이 아니었을까 싶다. 캔디가 어떻게 윌리엄 큰할아버지가 레이크우드에 있다는 것을 알았을까? 조르쥬가 알려준 건가? 그럴리가! 그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내 말을 거역한 적이 없었고, 필요한 일이 없을 시에는 항상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
경의와 존경심이 한껏 묻어나오는 목소리로 캔디는 자신이 갑자기 나타난 이유에 대해 설명했다. 그녀는 내 명령 하에 결정된 닐 라건과의 약혼을 취소해달라는 간청을 하러 왔다고 했다. 나는 누군가가 내 이름을 또다시 도용한 것에 대해 분노를 참을 수가 없었다. 거기다가 그것이 수년간 그녀를 괴롭혀온 남자와의 약혼을 강요했다니! 고모님의 계략임을 즉각 알아차렸다. 아니면 누가 감히 뒤에서 내 이름을 함부로 쓸 수 있겠는가?
이 자리에서 내 진짜 정체를 밝힐지 말지 끊임없이 갈등하고 있을 때 즈음, 나는 그녀가 어느새 말하기를 멈추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신이 정말로 윌리엄 큰할아버지에게 이야기하고 있는 것인지 의심을 하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내가 수년간 피하고 외면하였던, 두려운 순간이 결국 찾아온 것이었다. 나는 그녀가 내 목소리를 알아차릴 것이라는 믿음 하에 용기를 내기로 했다.
이후의 일들은 너무나도 순조로움 그 자체였다. 아니, 내가 상상한 것보다 훨씬 더 순조로웠다. 예상했던대로 그녀는 아무런 말도 잇지 못하고 충격에 빠졌지만, 나의 본모습을 받아들이는 데에는 그다지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뭐 어찌됐건 입양 이래로 나는 그녀가 계속적으로 편지를 써서 보내던 대상이었던 셈이다. 그녀는 내가 지금껏 거짓말을 해온 것을 나무라지 않았고, 대신 그동안 진실을 숨긴 이유에 대해 물었다. 나는 그녀가 듣고자 하는 설명 없이 그저 계속 사과하는 말만을 건넸으나, 그녀도 더이상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깊은 생각에 빠져있는 듯 했다.
참으로 다행이 아닐 수가 없었다. 물론 언젠간 내가 노신사로 알려진 윌리엄 큰할아버지의 비밀에 대해 모두 털어놓으리라 결심하고 있었으나, 지금이 그 때가 될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해보지도 못했다. 충격적인 진실을 알게 되고 또 이를 받아들이는 것은 절대 쉬운 일이 아닐 테다. 뭐, 아직은 모든 진실을 알게 된 것도 아니지만 말이다. 그녀는 아마 내가 수년 전에 언덕 위에서 만났던 그 추억 속의 소년이라는 것을 알면 훨씬 더 놀랄 것이다.
입양이 이루어졌을 때 나는 이십대 초반의 미혼자였다. 나는 내 정체를 쉽게 드러낼 수 없는 상황에 놓여있었을 뿐더러, 나를 우러러 보는 어린 양녀를 갖는 것 역시 거부했다. 그저 그녀의 조금 더 나이 많고 현명한 친구가 되어 곁에서 조용히 지켜보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런 내가 참혹한 사고를 당해 결과적으로 기억상실증을 얻게 되리라고 어느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캔디와 나는 시카고의 병원에서 우연히 재회했지만, 나는 물론 그 친절한 간호사를 전혀 알아보지 못했다. 그녀는 나를 예전에 몇 번 도움을 준 적이 있는 친구로 대했다. 합법적인 입양으로 묶인 우리의 관계에 대해 알지 못한채 그녀는 내가 꼭 친오빠같다고 말했고, 내가 전에 베푼 친절을 되갚기 위해 기억이 회복될 때까지 함께 살면서 나를 보살피고 싶어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그녀의 절친한 친구가 되었고, 그렇게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그녀는 자신의 이야기를 하나씩 풀어놓기 시작했다. 그녀의 순수한 첫사랑 ‘언덕 위의 왕자님’에 대한 이야기를 비롯하여 정말 남김없이 말이다. 물론 두말할 필요도 없이 기억을 잃은 내가 그 소년의 진짜 정체가 무엇인지 아는 바가 있을 리는 없었다.
캔디와 함께 살기 시작한지 몇 달이 되었을 무렵, 그녀는 드디어 뉴욕에서 사랑하는 연인을 만날 수 있게 되었다. 테리가 브로드웨이에서 열리는 자신의 공연에 그녀를 초대한 것이다. 서로 만나지 못한 지 벌써 일 년 이상이 된 만큼, 캔디는 기대에 한껏 부풀어 그가 보내준 편도표로 시카고를 떠났다. 그리고 며칠 후 완전히 슬픔에 잠겨 돌아온 그녀를 맞이한 나는 그만 할 말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녀는 내게 테리와 헤어질 수 밖에 없었던 이유를 비롯하여 모든 아픈 감정을 털어놓았고, 그런 그녀를 보며 나 역시 가슴이 찢어지는 듯 했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슬픔으로 괴로워하는 그녀에게 공감과 위로를 해주고자 했다. 품 안에 꼭 끌어안아 기대어 울 수 있도록 어깨를 내주었고, 뉴욕에서 생긴 일에 대해 이야기할 때 귀 기울여 들어주었다. 그 때까지만 해도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나는 어느새 그녀와 사랑에 빠지고 있었던 것 같다.
내가 그 비밀스러운 후견인이라는 사실을 그녀가 처음부터 알았다면, 자신의 인생에서 내가 지켜야 할 적합한 자리와 역할을 알려주었을 것이다. 그리고 함께 살 때에 비록 내가 모든 기억을 잃어버린 상태였다고 하더라도 나의 감정이 실제 위치가 제한하는 범위를 넘지 못하게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시절 나는 내가 누구인지 전혀 몰랐다. 그리고 그녀를 완전히 다른 시각으로 보게 되었다. 그래도 나는 항상 그녀를 향한 열렬한 마음을 숨기고자 노력했다. 지나간 사랑에 아파하는 그녀를 또다시 힘들게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평소와 같이 식당에서 접시 닦는 일을 하고 있던 어느 날, 갑자기 견딜 수 없을 만큼 극심한 두통이 느껴졌다. 몇 분 만에 기절해서 안쪽 방으로 옮겨졌다고 나중에야 들은 바 있다. 의식을 되찾고 현실로 돌아왔을 때 나는 예전의 내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주근깨 투성이의 귀엽게 웃는 얼굴이었다. 그제서야 내가 나의 양녀를 사랑하고 있었다는 충격적이고도 두려운 진실에 마주하게 된 것이다.
내가 가진 감정이 적절하지 않다는 것을 이해하고 다그칠수록, 사랑은 더욱 강해지고 깊어졌다. 잃었던 과거의 기억들이 하나 둘 돌아오자 나는 비로소 그녀가 왜 나에게 그토록 중요한 사람인지 깨우치게 되었다. 가문이 부여한 특별한 지위 때문에 주변에는 어릴 때부터 언제나 입을 굳게 다문 무표정한 하인들과 가정 교사뿐이었고, 함께 놀고 함께 웃으며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모두 나눌 친구 한 명 사귀지 못했던 내가 아니었던가.
차라리 다시 기억이 없던 때로 돌아가 그녀의 후견인이 아닌 진실한 친구 또는 그 이상이 되기를 원했다. 그러나 이미 늦어버린 뒤였다. 운명은 내게 너무나도 가혹했다.
그 날 나는 곧바로 집에 들어가지 않고 공원에 가서 끊임없이 갈등했다. 캔디에게 기억이 회복되었음을 알려야 하나? 아니면 그보다 먼저 내 마음을 고백해야 하나? 하지만 아파트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아직 그녀가 새로운 사랑을 받아들일 수 있을 때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오래된 신문들 위에 엎드려 잠들어있었다. 온통 테리에 관해 좋지 않은 기사뿐이라 내가 침대 밑에 숨겨두었던 것들이었다. 그 모습은 내게 그녀가 몇 달 전의 가슴 아픈 이별 이후로도 여전히 테리를 그리워하고 있다고 말하는 메시지와도 같았기에, 오직 그녀가 행복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내 감정을 억누르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한 가지는 확실했다. 나는 그녀와 도저히 헤어질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캔디에게는 잠시만 더 기억이 회복된 것에 대해 알리지 않기로 했다. 조르쥬에게 연락이 닿은 후, 나는 시카고 변두리에 위치한 작은 아파트에서 계속 그녀와 함께 살고 싶다는 의사를 전달했다. 언제나 그랬듯이 그는 내 뜻을 거역하지 않았고 내 판단에 작은 의심조차 보이지 않았다. 대신 그날 이후로 조르쥬와 사람들이 매일 아침 나를 데리러 오게 되었다.
나는 접시 닦는 일을 그만두고 동물 컨설턴트로 동물원에서 일하게 되었다고 캔디에게 거짓말을 하였다. 그때까지도 나는 그녀에게 진실을 말해야 할 지 갈등하고 있었으며, 솔직하지 못하고 거짓을 얘기하는 것에 대해 죄책감을 느꼈다. 매일 아침 그녀의 사랑스러운 얼굴을마주할 때마다 그녀가 기다리는 ‘좋은 소식’을 알릴 용기를 차마 내지 못했다. 그녀와 함께 하는 행복한 삶이 끝나버릴까봐 두려웠기 때문이다.
게다가 나는 일과 그녀와의 관계 사이에서 무척이나 괴로웠다. 사업가로서 매우 바쁜 생활을 지속하느라 더이상 그녀를 위한 요리를 할 수도 없었다. 심지어 캔디가 나의 빈번한 외식을 문제 삼으며 너무 많은 돈을 쓰는 것 아니냐고 불평할 정도였다. 가끔씩 주말에도 일을 하러 나가야 할 때엔 원하는 대로 그녀와 시간을 보낼 수 없는 것이 당연했다.
그렇게 몇 달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 겨울날 밤까지도 나는 여전히 그녀와 함께 마음 따뜻한 생활을 할 것을 고집하고 있었으나, 결국 캔디와 주인 아주머니 사이의 대화를 엿듣고 말았다. 아주머니는 나를 수상한 사람으로 의심하며 아파트에서 나가주기를 바라고 있었던 듯했고, 그제서야 난 비로소 이웃들이 우리가 친 남매가 아닌 것을 눈치챘음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동시에 캔디 역시 내가 자신에게 거짓말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나에 대한 신뢰를 버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더군다나 주인 아주머니에게 내가 나가야 한다면 자신도 함께 따라 나가겠다고 단호히 말함으로써 내게 큰 감동을 주었다. 하지만 나는 그 순간 때가 왔음을 느꼈다. 이제는 내 앞에 놓인 현실을 마주해야 했다. 하지만 난 끝까지 진실을 알리지 않은 채 그녀로부터 멀어질 것을 택했다. 무엇보다도 그녀를 향한 마음을 모두 묻어버릴 시간이 필요했기에, 나는 어떠한 연락 수단도 남기지 않고 그녀로부터 도망쳤다.
그 날 밤 이후로 나는 캔디를 피하려고 최선을 다했고, 셀 수 없을 만큼 여러 번 하늘이 정한 나의 역할은 그녀의 자상한 후견인이지, 이런 식으로 연모의 감정을 품는 것이 아니라며 자신을 질책했다. 그러나 단지 의식적으로 자각할 뿐이었지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나의 감정을 억제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비록 빡빡한 매일의 일정은 그녀에 대한 생각을 조금씩 줄이게 만드는 데 도움이 되었고 나는 많은 사람들 앞에서 전혀 내면을 드러내보이지 않았지만, 종종 밤중에 호사스러운 침대에서 깨어나 여기가 어디인지 그리고 내가 왜 여기에 있는지 갈피를 잡지 못하는 자신을 발견하곤 했다. 마치 그 겨울 날 밤 아파트 밖으로 나올 때 내 인격체의 일부가 그곳에 남겨졌기에 다시는 완전체가 될 수 없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녀를 잊으려고 노력하면 노력할수록 그리움이 더욱 커져갔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다. 향수병에 걸려있었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나는 매순간 그녀와 작은 아파트에서 보낸 일 년 조금 넘는 시간을 추억하고 있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내가 가장 즐겨한 일 중 하나는 일기였다. 외로운 나날마다 나는 거의 무의식적으로 펜을 들어 기분 또는 감정을 적어내려갔고, 일기는 마치 그녀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 듯 편안함을 주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무언가가 내 머리에 스쳐지나갔다. 나는 테리가 기다리고 있다는 말만으로 캔디가 닐에게 완전히 속았던 지난 일을 기억해냈고, 조르쥬에게 믿음직한 사람을 고용하여 테리의 행방을 알아보도록 지시했다. 그러자 그는 곧 돌아와 내게 테리가 록스타운에 있음을 보고했다. 내가 첫 번째로 한 일은 변장을 하고 테리를 찾아가 그가 나를 알아보는지 여부를 살핀 것이었다. 과연 테리는 그곳에 있었고, 가엾게도 형편 없는 극장에서 배우 노릇을 하고 있는 듯 했다. 그것도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할 정도의 만취 상태로. 그의 현재 처지가 캔디와의 이별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여긴 나는 그들을 위해 큐피드가 되어주기로 결심했다. 지나간 옛 사랑, 더군다나 그녀를 여전히 잊지 못하는 사람과 재결합하는 것보다 행복한 일이 또 있을까? 나와 함께 동행했던 조르쥬는 역시 내 결정에 대해 아무런 의사를 표현하지 않았고, 그저 테리를 찾아낸 자에게 두 사람을 계속 지켜보고 이따금 보고를 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따라서 자신을 고문하는 모든 상황으로부터 벗어나고자 나는 내 이름 하에 어딜 가든 항상 그녀를 생각하고 있다는 짧은 편지와 함께 봄 코트 선물을 담은 소포를 캔디에게 전송했다. 캔디가 소포를 받고도 다른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는다면 그녀에게 내가 특별한 사람이 아니었다는 표시로 받아들일 작정이었고, 그것이 내가 확실하게 그녀를 잊는 데 도움이 되리라 생각했다. 선물의 또다른 의도는 그녀가 록스타운을 내가 거주하는 곳으로 여기고 찾아가도록 유도함으로써 계획대로 테리를 만나게 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된다면 내가 다시 그녀의 후견인으로 돌아가 그에 걸맞는 역할을 수행했다는 좋은 구실을 만들 수 있게 될 터였다. 나는 이 두 가지가 가능성의 전부라고 생각했고, 또 그렇게 되리라고 믿었다.
캔디는 록스타운에 갔다. 그런데 놀랍게도 머지 않아 시카고에 홀로 돌아왔다. 조르쥬의 지시를 받은 자가 전한 보고에 따르면 그녀는 분명히 테리를 보았고 잠시 머무르긴 했으나 연극이 끝나자 바로 그곳을 떠났다고 했다. 그리고는 한 여성과 근처 식당에서 짧은 만남을 가졌는데, 나중에 들은 바로는 테리의 어머니 엘리노어 베이커였다고 한다. 그러나 캔디는 결국 테리와 만나지 않았고, 가장 놀라운 점은 다음으로 이어진 이야기였다. 그녀가 내 인상착의가 그려진 그림을 보이며 금발 머리에 푸른 눈을 가진 남성을 찾아 온 마을을 수소문하고 다녔다는 것이다.
캔디가 정말로 나를 찾은 걸까?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이었다. 물론 나도 캔디와 내가 강한 유대감을 형성했다는 사실을 부인하지는 않지만, 그녀가 나를 오빠 이상으로 여길 것이라고는 기대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내가 정말 친오빠 같다고 항상 이야기해온 것은 캔디가 아닌가? 혹시 내가 사라지고나서 감정에 변화라도 생긴 걸까?
이것이 록스타운 사건을 통해 내가 알게 된 전부다. 그래서 어제 산장에서 같이 난로 앞에 앉아 몸을 말리고 있을 때 나는 넌지시 테리가 브로드웨이에 돌아간 소식을 꺼내보았다. 캔디는 정말 진심으로 그에 대해 기뻐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곧이어 생각에 잠긴 채 별다른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길었던 하루를 마무리하던 어젯밤, 캔디는 아무런 불편함 없이 침대에 눕자마자 잠이 들었다. 하지만 난 그럴 수가 없었다. 온갖 생각은 쉽게 내가 휴식을 취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나는 하루를 끊임없이 되새겨보았고 그 날 일어났던 일들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캔디에게 레이크우드에 가라고 일러준 조르쥬에게 고마운 마음뿐이었다.
나는 조르쥬가 록스타운 사건에 대한 보고를 마친 후의 일을 또렷이 기억했다. 그대로 붕 떠 있는 기분이었고 꽤나 오랜 시간 할 말을 잃었던 것 같다. 심지어 아주 잠깐 조르쥬의 얼굴에 나를 안쓰러워하는 기색이 떠오르기까지 했다. 어찌해야 할 바를 몰라하는 나의 모습이 항상 침착하고 냉정했던 그에게 잠시나마 영향을 준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는 빠르게 다시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갔고, 더이상 어떤 감정도 내비치지 않았다.
조르쥬가 오랜 시간, 특히 로즈마리가 세상을 떠난 이후 나의 유일한 친구이자 동료였던 것을 생각해보면 이젠 거의 친형이나 마찬가지인 것 같다. 그가 이 세상에서 나를 꿰뚫어볼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라 해도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그래서 조르쥬는 내가 기억을 회복하고 연락을 한 이후부터 나를 괴롭히는 내면의 갈등을 감지하였고, 캔디가 닐과의 약혼을 강요받자 지시를 거역하기로 마음먹은 것이 아닐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보니 나는 아직까지도 낮잠에 빠지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약간 들어 열심히 꽃을 하나 하나 엮고 있는 캔디의 옆 얼굴을 바라 보았다. 내 화관을 만들기 위해 그녀가 저렇게 노력하고 있다는 것은 큰 감동으로 와닿았다. 그 순간 나는 그녀가 어렸을 때 만난 ‘이상한 옷을 입은 우주인’이 바로 나라고 말해버릴 뻔했다.
하지만 나는 내가 그저 농담 던지듯, “캔디, 그거 알아? 너가 다시 만나고 싶다고 했던 그 스코틀랜드인 소년이 나였어. 맞다, 너 지금까지 내 뱃지를 지니고 있다고 했지?”라고 말할 수 없다는 걸 안다.
웃기지도 않는 소리다. 언덕 위의 왕자는 곧 첫사랑이나 마찬가지였는데, 그녀는 과연 그 어린 십대 소년이 자라 훗날 자신의 양부가 되었다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혹시라도 그녀가 나한테 특별한 감정을 가지고 있다면 또 모를까…
조르쥬가 지금 캔디를 데리러 오고 있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에 나는 지체하지 않기로 했다. 잽싸게 일어나 앉은 후에 이름을 불렀다. “캔디?”
그녀는 화들짝 놀라 말그대로 펄쩍 뛰어올랐고,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몸을 돌렸다. “알버트 씨? 주무시는 것 아니었어요?”
옅은 미소를 띈 채 나는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그리고 용기를 내어 그녀의 한 손을 잡은 뒤 그 눈을 가만히 응시했다. 캔디는 약간 당황한 듯 꽃을 떨어뜨리고 얼굴을 붉혔다. 이러한 그녀의 반응이 나를 몇 주 동안 괴롭혔던 질문을 입 밖으로 꺼낼 수 있게 만들었다. “캔디, 혹시 나를 찾고 있었니?”
그녀는 내 말의 뜻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미간에 주름을 잡아보였다. 그 질문은 내가 정말 오랫동안 마음에 담아온 것이었기 때문에 난 다른 설명은 생략하기로 했다. 목소리를 가다듬은 후 이렇게 덧붙였다. “내 말은, 그러니까 록스타운에서 말이야.”
난 그녀가 내 가슴의 빠른 요동침을 알아차리지 못하기를 간절히 바랐다.
시선을 피하고 뺨을 점차 붉게 물들이는 그녀는 너무나 사랑스러웠다. “어떻게 아셨어요?”
목소리는 거의 알아듣기 힘들 정도로 작았지만 그 말이 내게는 긍정적인 것으로 여겨져서, 나는 앞쪽으로 숙여 그녀의 다른 한 손도 잡았다. 그녀는 놀란듯 한 순간 고개를 들었다.
“캔디,” 그녀의 눈을 응시하고 내 목소리가 가능한 한 부드럽게 들리도록 노력하면서 입을 뗐다. “그 이유를 얘기해 줄 수 있니?”
그녀는 어떻게 대답해야 좋을지 고민되는 듯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잠시 후엔 아예 시선을 돌려 장밋빛으로 물든 뺨을 감추어버렸다. 내가 침을 삼키며 다음엔 어떤 말을 해야 할지 곰곰이 생각하고 있을 때 즈음, 그녀가 눈물이 맺힌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알버트 씨, 정말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몰라요…”
그 대답이 내 가슴을 뒤흔들어놓아서, 나는 순간 할 말을 완전히 잃어버렸다. 잠시 동안 우리 사이에 침묵이 이어졌다. 갑자기 그녀가 이렇게 물었다. “알버트 씨가… 테리와 만나게 해주시려고… 록스타운에서 소포를 보내신 거죠? 그렇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당혹스러운 듯 젖은 눈으로 다시 물었다. “왜요?”
나는 그녀가 테리와 재회하기를 원하는 줄로만 알았다고 얘기하려고 했으나, 이 순간만큼은 그의 이름을 꺼내고 싶지 않았다. 대신 나는 감성적인 목소리로 내 자신까지 분명히 알아듣도록 크게 말했다. “너를 너무 사랑하니까, 캔디. 행복하게 해주고 싶었어.”
내 고백을 들은 그녀는 당황한 듯 아름다운 눈을 크게 떴고, 눈물이 그녀의 볼을 따라 흐르기 시작했다. 지금 충격을 받은 사람은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하지만 동시에 나는 후련함을 느꼈다. 깊은 한숨을 내쉬며 속으로 이렇게 외쳤다. ‘드디어, 드디어 내가 말했어, 이 한 마디 때문에 그동안 내가 얼마나 내 자신을 괴롭혀왔던지!’
애정을 담은 손길로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면서 말했다. 긴장을 완화시키고자 내 자신을 놀리는 듯한 말투였다. “울지 마, 캔디. 내가 너를 사랑하는 게 그렇게 나쁜 건가?”
그러자 그녀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또 동시에 흐느꼈다. “알버트 씨, 전 아직도 우리가 나누어 먹었던 샌드위치를 기억하고 있어요… 알버트 씨가 둘이서 슬픔과 고민 모든 것을 나누자고 약속하셨던 것도요…”
그녀가 무슨 말을 하고 싶어하는 건지 궁금했지만,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이야기를 계속했다. “하지만 그 겨울 날 이후로 알버트 씨는 저와의 모든 연결고리를 끊어버리셨죠… 알버트 씨를 그리워하면서 정말 단 하루도 마음 편히 잠든 적이 없었어요… 매일 밤 울었죠…”
“캔디, 정말 미안하다…” 이 말이 지금 내가 웅얼거릴 수 있는 전부였다. 나는 그녀를 속상하게 한 데에 큰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 날 그녀를 떠나기로 결심했을 때, 나는 내가 곁을 지키지 않아도 그녀가 삶을 훌륭히 지속해나갈 수 있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알고 있는 그녀는 언제나 자신감 있고 강했으며 독립적이었기 때문이다.
나를 향해 시선을 고정한채, 그녀는 달콤한 목소리로 이어갔다. “너무 보고 싶어서, 알버트 씨를 찾기 위해 얼마나 필사적이었는지 몰라요. 마틴 선생님께서 많이 도와주셨죠. 알버트 씨의 초상을 그려주셨거든요.”
‘그 그림으로 날 찾아다닌 거였구나…’ 나는 따뜻하게 그녀를 감싸 안았다. 그러자 그녀는 머리를 내 어깨에 깊게 기대었다. 나는 눈을 감았다. 이렇게 오래오래 캔디를 품 안에 안을 수 있다면 다른 어느 것도 절대 부럽지 않을 것 같았다. 더군다나 나는 이미 그녀로부터 듣고자 하는 대답을 모두 들었다.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서 알버트 씨로부터 소포를 받았을 때엔, 두 번의 망설임 없이 곧장 록스타운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어요. 알버트 씨가 계속 그곳에 남아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말이죠.”
순간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녀는 나를 마주하기 위해 몸을 편 뒤 부드럽게 이야기를 이어갔다. “하지만 결국 알버트 씨를 만날 수 없었죠. 너무 걱정이 됐어요. 알버트 씨가… 우리 사이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에 대해서요.”
나는 즉각 대답했다. 내 두 눈이 그녀로부터 절대 떠나지 않은 채로. “이제는 알겠니?”
시선을 피하는 그녀는 낙심하고 혼란스러워 보였다. 깊게 한숨을 쉰 뒤, 그녀는 고개를 약간 들고 체념한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맞아요… 알버트 씨는 제 양부이시죠. 법적으로요…”
그녀가 내 갈등과 고통을 분명히 이해하고 있었고, 나는 이에 대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멍하니 주변에 흩어진 꽃들을 만지작거릴 뿐이었다. 꽤 오랜 정적이 흐른 후, 그녀가 침묵을 깨고 돌연히 감사의 인사를 하기 시작했다. “오해하지 마세요, 알버트 씨. 저는 평생 윌리엄 큰할아버님의 친절을 잊지 않고 감사할 거에요. 불쌍한 고아였던 저에게 안식처를 주셨고 훌륭한 교육도 받게 해주셨죠. 다만…”
나는 그녀가 이야기를 계속하기를 기다리며 눈썹을 추켜세웠다. 그녀는 이를 알아차렸지만, 아무 말도 입 밖으로 내뱉지 않았다. 나는 침착하게 기다리려고 애썼다. 무언가 중요한 말이 준비되어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목을 잠시 가다듬은 후 시선을 내리깔며 그녀가 작은 목소리로 이렇게 덧붙였다. “다만… 저는 알버트 씨의 양녀가 되고 싶지 않아요.”
‘더 무슨 말이 필요해? 그녀의 뜻이 무엇인지 충분히 알아차리지 않았어?’
사실이다. 그녀는 내가 수년 전 그녀를 입양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고, 오랫동안 나를 오빠처럼 여겨만 왔다. 바라건대 최근까지 말이다.
따라서, 나는 확신을 갖고자 용감하게 그녀에게 물었다. “그럼 다시 내 여동생이 되고 싶은 거니, 캔디?”
그녀는 강하게 고개를 가로저었고, 내 두 눈을 또렷이 응시했다. 그녀의 침묵은 나에게 충분 그 이상이었다. 더이상 덧붙이지 않고 들판의 꽃을 꺾으며 나는 그녀에게 따뜻하게 물었다. “신경 쓰이니?”
내 질문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파악한 그녀는 미소를 지어보였다. 나는 그 사랑스러운 미소를 긍정의 의미로 받아들였고, 그녀의 허락 하에 가까이 다가가 다정하게 탐스러운 머리카락 사이에 내 손으로 꽃을 꽂아주었다. 그녀의 에메랄드 빛 눈을 가만히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그리고 나는 진심으로 그녀에 대해 찬사를 표했다. “캔디, 네가 무척 아름다운 숙녀라는 걸 알고 있니?”
부끄러운 듯이 미소를 띄우며 그녀는 내 시선을 피했다. 속눈썹이 떨리고 있었다.
나는 마침내 내 사랑을 고백했다. “캔디, 나의 온 마음을 다해 너를 사랑해. 다 표현하지 못할 정도로 너를 원해. 너 없는 삶은 외롭고 고독할 뿐이야.”
“알버트 씨, 제 마음도 같아요.”
그녀의 대답은 마치 음악 같았다. 너무 오랫동안 꿈꾸어온 이 순간이었고, 다른 망설임 없이 나는 부드럽게 그녀의 손을 잡고 내 두 눈을 촉촉해진 그녀의 것에 맞추었다. 그리고 동시에 천천히 다른 손을 들어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 가볍게 그녀의 뺨을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그녀를 향해 몸을 숙이고 속삭였다. “눈을 감아봐, 캔디.”
그녀는 기꺼이 그렇게 했다. 나는 두 개의 손가락으로 탐스러운 그 턱을 살며시 들어올렸고, 입을 맞추었다. 지금쯤 도착했을 법한 조르쥬가 보고 있건 말건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캔디와 나는 서로의 마음을 확인했고, 그것만으로도 너무나 행복했다.
그런데 갑자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무언가가 자꾸만 내 팔꿈치를 찌르는 것이었다. 처음엔 무시했으나, 나는 내 어깨를 흔드는 어떤 이의 손에 의해 잠에서 깨어날 수 밖에 없었다.
“일어나세요, 알버트 씨!” 틀림없는 캔디의 목소리였다. 눈을 힘겹게 뜨자 나를 향한 그 사랑스러운 미소를 보였다. 꿈이 너무 생생했던 탓인지, 내 가슴이 여전히 빠르게 뛰고 있었다. 나는 혼란스러움을 떨쳐버리기 위해 얼굴을 때리고 눈을 거칠게 비볐다. 천천히 몸을 일으키자 캔디가 급하게 나를 가로막았다. “움직이지 마세요, 알버트 씨! 건드리시면 안돼요!”
비로소 나는 그녀가 조금씩 꽃의 위치를 다시 고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잠시 후에 그녀는 기쁜 듯 내게 말했다. “이제 일어나세요. 천천히요!”
나는 조심스레 일어나 앉았다. 그리고 그녀가 나를 위해 만든 선물을 보고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화관이라 할 수 없을 정도로 매우 길게 엮여진 수많은 꽃들은 그녀와 나를 둘러싼채 하나의 큰 하트 모양을 이루고 있었다.
내 얼굴에 떠오른 놀라움을 알아차렸는지, 그녀가 쑥스러워하며 물었다. “맘에 드세요?”
‘내게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니, 캔디?’
묻고 싶었지만, 아직 꿈에서 완전히 헤어나오지 못한 나는 그녀의 질문에 과연 어떻게 답해야 좋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그리고 우리는 가까운 곳으로부터 경적 소리를 들었다. “조르쥬가 벌써 왔나보네요!”
그녀는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났고, 나 역시 수풀을 지나 그녀를 따라갔다. 그녀가 조르쥬에게 다가가는 것을 보자, 벌써부터 사무치는 그리움이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진심으로 내 비서의 사려 깊음에 대해 감사의 인사를 한 후 나는 멀어지는 그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지금 이 순간 내게 남은 유일한 위안거리는 내일 있을 소위 ‘약혼식 파티’에서 그녀를 다시 만날 수 있다는 것뿐이었다.
Hi Ms Puddle! Why is this post in Korean? 😉 Are you Korean, and did you write the post your Korean readers?
Hi Kat, I’m Chinese too. 🙂 Please read this post for detai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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